[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12)고려의 경기인 道가 본관인 성씨 인물 ⑦남양홍씨와 '홍자번'

   
▲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위치한 당성은 남양반도의 서신·송산·마도면의 경계가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에 위치한 구봉산 정상부와 동향한 계곡, 서남쪽 능선에 성벽을 쌓았다. 당나라에서 파견한 8학사 가운데 한 사람인 홍천하가 동래해 당성에 정박함으로서 당성 홍씨의 발상지로 유명해졌다. 사진은 당성 사적비.

남양 홍씨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을 본관으로 하는 대표적인 한국의 성씨이다. 남양 홍씨는 고려 건국시기에 왕건을 도와 공을 세운 홍은열(洪殷烈)을 시조로 추숭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홍관(洪灌)·홍자번(洪子藩)·홍규(洪奎)·홍경(洪敬)·홍언박(洪彦博)·홍빈(洪彬) 등이 현달하여 명문 귀족가문이 되었다. 남양 홍씨는 고려시대에는 인주 이씨·해주 최씨·이천 최씨와 더불어 4대 명문가문으로 꼽혔다.

현재 화성시 남양은 고구려 때의 당성군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당은·익주·강령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 태종 때 개칭한 것이다. 본래 당성이란 지명은 중국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에서 도래한 8학사의 사적에서 비롯한다. 당나라에서 파견된 8학사 가운데 한 사람인 홍천하(洪天河)가 이 지역에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세거하였다고 한다. 남양홍씨를 이전에는 당성 홍씨로 불렀으며, 지금도 일부에서는 그대로 쓰는 후손들도 많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남양현에 세거한 성씨를 보면, 홍(洪)·송(宋)·방(房)·박(朴)·최(崔)·서(徐) 씨가 살았다. 인물조에 기록된 고려시대의 명현은 모두 남양 홍씨의 인물이다. 조선조에도 마찬가지이다.

널리 알려졌듯이 남양홍씨는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의 전혀 다른 두 계보가 있다. 당홍은 당나라에서 귀화한 홍천하의 후손이고, 토홍은 고려 고종 때 금오위별장을 지낸 홍선행(洪先幸)의 후손으로 일컬어 온다. 당홍·토홍이라는 속칭은 이처럼 귀화파와 토착파의 구분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귀화파인 당홍의 역사가 300년 이상 오래 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모두 한 조상의 관계가 아닌가 여겨진다. 두 집안의 조상이 비록 달리 내려오나 동성동본인 만큼, 한 집안으로 보아 통혼하지 않는다. 서로 조상을 달리하는 두 집안이 동성동본을 일컫는 성씨는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오직 남양홍씨 뿐이다.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위치한 당성은 남양반도의 서신·송산·마도면의 경계가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에 위치한 구봉산 정상부와 동향한 계곡, 서남쪽 능선에 성벽을 쌓았다. 당나라에서 파견한 8학사 가운데 한 사람인 홍천하가 동래해 당성에 정박함으로서 당성 홍씨의 발상지로 유명해졌다.

#남양 홍씨의 발상지인 화성시의 당성(唐城)

당성은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서해안의 군사 요충지였으며 중국과의 교류를 위한 교두보였다. 원효가 당나라로 불법을 구하러 가다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득도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당나라에서 파견한 8학사 가운데 한 사람인 홍천하가 동래하여 당성에 정박함으로써 당성 홍씨의 발상지로 유명해진 곳이다. 이색(1328~1396)의 ‘당성인’이란 작품에는 덕산촌주가 신라 말기에 도래하여 당성에 정착한 이후 대대로 번창해진 내력이 소개되어 있는데, 덕산촌주는 바로 홍씨의 선시조(先始祖)인 홍천하를 지칭한다. ‘남양홍씨족보’에 의하면 그는 당나라 8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구려에 귀화했다가 신라 선덕여왕 때 태자태사가 되고 당성백에 봉해졌다고 한다. 참고로 ‘퇴계선생문집’에 “당나라 말기에 파견한 8학사 가운데 1인은 홍씨족보를 살펴 고증한다. 당나라 황소의 난 때 홍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배를 타고 와서 당성에 정박하였다. 즉, 목은의 ‘당성인’에서 덕성촌주라 일컬은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홍천하가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와서 정착한 곳은 당성 은수포이다. 이곳에서 풍교를 펼치다가 연개소문의 전횡과 삼국간의 전쟁으로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자 난을 피하여 신라 속현인 덕산촌(현재 산청군 덕산면)에 은거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홍천하를 우대하여 덕산촌주를 봉하였으며, 홍천하는 처음 상륙한 지역에 성을 축조하고 당성이라 하였다.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의 하나였던 남양홍씨

남양 홍씨의 태동에 관련해서 가장 주목된 자료는 이색의 ‘남양부망해루기’이다. 이 글에서는 “남양부는 삼국시대에는 당성이라고 이름 하였다. 고려에 들어와서 중세 이후로는 익주로 되었다. 이 고을의 홍씨는 태조가 처음 고려를 세울 때부터 공을 세운 이가 있었으니, 휘 은열이 바로 그 사람이다. 대대로 거족을 이루었으니, 강도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남양군이 권신을 베어 죽이고, 정권을 왕실로 도로 돌렸으며, 문예부주(文睿府主)를 낳아 두 왕조의 태후가 되었다. 이로 인해 고을을 부(府)로 승격시켰다”고 하였다.

강도의 말기에 남양홍씨의 전성기를 마련한 이는 바로 남양부원군에 봉해진 홍규(洪奎)이다. 문예부주는 그의 딸로 충숙왕의 비인 명덕왕후을 지칭한다. 두 왕조는 충혜왕과 공민왕을 지칭한다. 명덕왕후 즉위와 함께 그의 출생지인 당성은 남양부로 승격되었으며, 명덕태후의 오라버니 홍융(洪戎)은 남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로부터 당성홍씨로 일컫던 명칭도 남양홍씨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태사공으로 지칭되는 홍은열은 홍천하의 10대손으로 남양홍씨 당홍계의 시조이다. 이후 고려시대에 명현들이 대거 배출되어 고려 4대 명문가문의 하나로 부상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고려 인종 때 홍관(洪灌 ?~1126)은 서긍의 ‘고려도경’에도 소개된 인물이다. ‘남양홍씨족보’에는 시조 홍은열의 5세손이며 군기감사 덕승(德升)의 아들로 되어 있다. 홍관은 집상전·보문각·청연각·보전화루 등의 편액을 썼을 정도로 서예로 이름이 높아‘근역서화징’에도 소개된 인물이다. 관직은 직사관·어사중승·동북면병마사·상서좌복야·청연각학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호위하다가 척준경의 난군에게 살해당하였다. 추성보국공신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평(忠平)이라 수여된 인물이다.

   
남양사(南陽祠)는 남양홍씨 시조, 은열(殷悅) 태사공을 배향(配享)한 사우(祠宇)이다. 태사공의 묘지는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홍묘리 토산 취적봉에 있다. 그러나 국토분단으로 남한의 후손들이 성묘는 물론, 세일제(歲一祭) 향사(享祀)에 참사할 수 없게돼 애타는 마음으로 청주를 중심으로 경향각지의 종친들이 뜻을 모아 1971년 충북 청원군 미원면 수산리 동산에 신조 사우를 건립했다.

홍규(洪奎 1242∼1316)는 이색의 ‘남양부망해루기’에도 거론된 인물이다. 강도의 말기에 원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원종을 임유무가 배척하여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자, 홍규가 송송례 등과 함께 삼별초군의 힘을 빌려 임유무를 죽이고 나라를 안정시켰다. 이로 인해 정안공신에 봉해졌다. 그의 딸은 충숙왕비인 명덕태후가 되었다. 그는 벼슬이 상의첨의 도감사에 이르고 남양부원군에 봉해졌다.

홍빈(洪彬 1288~1353)은 충혜왕 때 충신이다. 1341년에 조적 일당의 참소로 충혜왕이 원나라에 압송되자 함께 잡혀갔는데 그가 왕에 대한 무고가 사실이 아님을 변호해서 충혜왕은 다시 복위해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같은 공로로 1등 공신에 책록하고 당성군에 봉했다. 이색은 ‘당성부원군홍강경공묘지명’에서 그를 칭송하여 “중국에서 벼슬할 적에도 명예와 절조를 지켜 칭송을 받았고, 본국에서 벼슬할 적에도 총재의 지위에 이르도록 사직에 공을 세운 분이 계시는데, 이러한 면에서는 강경공 한 사람이 유일하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 명신인 홍언박(洪彦博 1309~1363)은 홍규의 손자로서 국가에 많은 공을 세웠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고 남양후에 봉해졌다. 목은 이색에게는 좌주이기도 하다. 이처럼 고려시대 명성을 떨쳤던 남양 홍씨 가문은 홍언박의 손자인 홍륜(洪倫)이 공민왕을 시해하는데 가담하여 끝내 멸문지화를 당했다.

#고려 충렬왕 때 백성의 편에 서서 왕정을 보필한 충정공 홍자번(洪子藩)

홍자번(1237~1306)의 자는 운지(雲之). 동지밀직을 지낸 예(裔)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해 남경유수판관·광주통판·충청경상전라안찰사를 역임하며 치적을 쌓았다. 호부시랑을 거쳐 1271년(원종 12년) 우부승선에 임명되자 왕에게 친히 서정을 보살필 것을 건의하였다. 그 뒤 좌승선·승선 등으로 승진하였다. 1278년(충렬왕 4년)에는 지밀직사사로 왕을 시종해 원나라에 들어갔다. 이듬해 판밀직사사에 올랐다. 그 해에 일본정벌을 위한 몽고의 계획이 진행되자 전라도도지휘사로 파견되어 전함의 수리·건조를 담당하였다. 이후 지첨의부사·도첨의찬성사·첨의찬성사를 거쳐, 1294년 첨의중찬에 이르렀다. 이듬해 지도첨의사사로 자리를 옮겼다. 1296년 다시 우중찬에 임명되자 백성들을 위한 대책으로 ‘편민십팔사(便民十八事)’를 올렸다. 이것은 당시 권세가들의 전민 강탈이 심해서 사서인들의 불만이 심화되자, 홍자번은 민심의 동요를 수습하고 생활의 안정을 꾀하기 위한 방안으로 당시 사회의 여러 분야에 걸쳐 나타난 폐단을 언급하고 그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내용은 주로 관리의 작폐방지, 공부(貢賦)의 균정과 정액 이외의 공부수납 억제, 의창 등을 통한 백성의 구휼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홍자번이 권문세족 출신이라는 정치적 입장에서 오는 한계가 있었다. 즉 작폐의 책임을 주로 지방관과 출사원사에게 돌리고 권문세가에 대해서는 은병, 세포, 능라 등을 강제로 구입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정도의 지적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1298년에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교지를 통해 정부 측 입장의 개혁의지를 표출할 때 ‘편민십팔사’가 토대가 되었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1298년 충선왕이 재위한 동안 좌복야참지광정원사가 되었다가 곧 첨의중찬에 임명되었다. 그 해 충렬왕이 복위하자 벽상삼한공신에 봉해졌다. 이 무렵 충렬왕·충선왕 부자 사이가 극도로 악화됨에 따라 갖가지 정치적 문제가 야기되었다. 이 때 1303년 왕 부자를 이간시킨 오기·석천보를 붙들어 원나라에 보내는 등 부자의 정의를 회복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그 해 도첨의좌중찬에 임명되었으나 1305년 참소로 파직되었다. 그 뒤 자의도평의사사로서 왕을 수행해 원나라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왕유소·송린 등의 이간 책동을 자세히 진술하고, 아울러 두 왕을 받들고 귀국하려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듬해 원나라에서 죽었다. 추성동덕익대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에 추증되고, 충선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홍순석 강남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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