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19) 국도, 개경의 문화유산
① 용의 후손 고려 황제들-건국신화와 신성 의식

   
▲ 고려수창궁의 용머리 조각

김성환 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사

#건국신화와 신성(神聖) 의식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나 중세, 현대에도 어느 나라든 건국 내지 집권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한 정권의 집권 과정과 관련한 드라마틱한 에피소드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현대로 범위를 좁힌다면, 이·박·전 아무개 대통령의 어떤 이야기 등이다. 대개 정권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집권세력이 경주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고대사회에서 한 왕조의 탄생 과정은 천명을 획득해야만 가능한 것이었고, 그 시조는 하늘의 대리자로서 민생을 다스린다고 인식되었다. 따라서 천명을 받아 통치하는 국왕은 다른 세력이나 집단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였고, 그 특별함을 증명하기 위한 또 다른 특별함을 항상 보여주고, 왕조 운영의 한 축을 이에 기대곤 하였다. 시조의 특별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이야기를 건국신화라고 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한 또 다른 특별함을 신성으로 규정짓는다. 우리에게는 시조를 중심으로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의 건국과정을 담은 건국신화가 전하고, 그 내용은 대략 하늘을 대표하는 천신(天神)과 땅을 대표하는 지모신(地母神)의 결합으로 마무리된다. 고조선의 환웅과 웅녀, 고구려의 해모수와 유화, 신라의 혁거세와 알영, 가야의 수로와 허왕후 등의 관계가 그러하다. 건국신화는 또 매년 일정한 의례를 반복하는 가운데 소속 집단의 결속력을 다지고 사회적 통합력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부여의 영고와 고구려의 동맹 등 고대사회의 제천의례는 그런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고려는 우리 역사에서 고대사회를 끝내고 중세를 시작한 왕조이다. 발전론적인 측면에서 역사를 들여다보기 위해 그 단계를 구분하는 방법은 해당 사회의 여러 모습을 종합 검토한 결과에 따라 이루어진다. 대체로 고려를 중세로 규정함은 그 이전의 고대보다 진전된 사회상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건국신화의 측면에서 이를 이야기할 수 있다면, 고려의 건국신화는 앞선 시대에서 절대적인 존재였던 하늘과의 관계성이 단절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것이 하늘에 대한 의존도가 급격하게 낮아졌음을 뜻하지 않으며, 중세적 모습이라 이야기 할 수도 없지만, 하늘을 활용하고 그 이상 징후를 해석하는 방법에서 앞 시대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단계로 진전되는 과정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고려 건국신화와 용(龍)

태조 왕건은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집권이 천명으로 이루어졌음을 대내외에 밝혔다. 또 추대 과정에서 몇 차례의 사양을 통해 유교적인 성인군주론의 형식도 갖추었다. “하늘의 권위를 매개로 덕이 뛰어난 사람이 왕이 된다”는 이 논리는 사실 역사에서 역성혁명의 근거였다. 천명에 따른 집권이라는 사실은 500년에 가까운 고려 사직에서 왕위 교체 때마다 즉위 조서 등을 통해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이런 논리적인 증명만으로 세습되는 왕위 교체를 지속하기에는 부족했다. 천명이란 항시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것이 고대 왕조에서 사용되었던 왕실의 신성 관념이다. 왕실은 백성은 물론, 관료들과 비교할 수 없는 신분을 가진 초월적인 존재이며, 그중에 왕위를 잇는 적통(嫡統)은 지존의 자리였다. 그것은 사회 환경으로 범주되는 2차적인 것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따라 출생과 동시에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려 왕실의 신성성은 하늘에서 부계로 이어지는 고대사회의 전통에서 벗어나있다. 그 신성성은 부계가 아닌 혼인을 통한 모계에 의해 확보되는 것이었고, 그 역시 수차례의 반복을 통해 축적되는 것이었다. 3대(조→부→자) 또는 2대(부→자)로 이루어지는 고대 건국신화와 달리 7대의 비부계의 계보 ‘고려시대의 양측적 친속관념의 소산이다’로 이루어지는 고려 건국신화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대미를 서해용왕의 딸이 장식하여 고려 왕실의 ‘용손(龍孫) 인식’은 탄생한다.

‘고려사’의 ‘고려세계(高麗世系)’에 실려 있는 고려 건국신화 중에서 관련된 부분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던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이 뱃길을 막아선 늙은 여우를 활을 쏘아 퇴치한 공으로 서해용왕의 딸과 혼인한다. 작제건과 함께 송악으로 온 용녀는 우물을 통해 서해를 오가다가 용궁으로 돌아갔는데, 그 사이에 낳은 아들이 용건이었다. 용건은 꿈속에서 본 여인인 몽부인(夢夫人)과 혼인하여 도선의 계시로 삼한을 통합할 임금이자 대원군자(大原君子)인 왕건을 낳았다” 서해용왕은 왕건의 외증조로 고려왕실의 굳건한 지지기반이 되었다. 이 부분은 왕건 가문이 예성강과 바다가 만나는 송악을 중심으로 세력을 도모한 호족 출신, 즉 강과 바다를 통한 무역 등으로 정치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한 것과 관련하여 형성된 전승이다. 개성 바로 옆 정주(貞州)의 앞바다에서 열렸던 용왕도량(龍王道場)은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청자구룡형 주전자(국보 제96호·국립중앙박물관)

#‘용의 후손(龍孫)’에 관한 기록들

고려 왕실과 용의 관련성은 의종 때 김관의의 ‘편년통록’, 민지의 ‘세대편년절요’와 ‘본국편년강목’ 등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천령(天靈), 오악(五嶽), 명산대천과 함께 용신(龍神)이 모셔지며 왕실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팔관회는 어떤 일이 있어도 변경하거나 중단하지 말라는 태조의 유훈이 있었다. 여기에서 용은 다른 신(神)과 달리 고려 왕실의 조상신 숭배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국청사의 금당에 모셔진 석가여래 사리의 영험함을 기록한 자료(國淸寺金堂主佛釋迦如來舍利靈異記)에 따르면, 신왕조 창건을 돕던 능긍(能兢)이라는 승려는 왕건에게 불법의 중요성을 “성군께서 삼한을 합하여 한 나라로 이룬 것과 풍토가 서로 합치되니, 만일 불법을 구하여 세상에 널리 행하도록 한다면 뒤를 잇는 용손의 수명이 연장될 것이고 왕업도 끊어지지 않아서 항상 한 집안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왕건의 집안을 ‘용의 후손’과 연결하고 있다.

태조의 장남으로 왕위를 계승한 혜종은 29명이나 되는 왕건의 부인 중에서 나주 호족 오다련의 딸인 장화왕후 오씨의 소생이었다. 왕위에 오른 지 2년만인 34세로 죽었지만, 그는 항상 잠자리를 물로 적셔 두었고, 큰 병에 물을 담아두고 끊임없이 팔을 씻어 정말 용의 아들(龍子)이라 할 만했다고 한다. 왕건의 아들 중에서 비교적 세력이 약한 그가 태조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진정한 용의 아들(眞龍子)이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경우는 현종도 마찬가지였다. 왕위계승권에서 벗어나 있던 대량원군인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몇 차례에 걸친 용의 아들이라는 예시와 증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천추태후의 견제로 삼각산 숭교사의 승려가 되었던 그가 다른 승려의 꿈에 용과 사람으로의 변신을 자유자재로 하였다는 것, 그를 빗대어 “머잖아 용궁까지 도달할 물”이라거나, “지금은 작은 뱀이지만 하루아침에 용이 되기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시를 통한 한 노승의 예언이 그것이다.

문종이 죽자 박인량은 애도문에서 고려 왕실이 태조 이래 “용손이 계승하여 일어나서 큰 기업이 영원히 성대하였다”고 하였고, 문종의 아들인 광평공 왕원(王源)의 묘지명에는 그의 “출계(出系)가 용손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종은 왕의 생일을 ‘용이 태어난 경사스러운 날’이라는 뜻으로 경룡절(慶龍節)이라 하였고, 의종은 거처를 경룡재(慶龍齋)라 하기도 했다. 용의 후손이라는 고려 왕실의 신성 관념은 고려왕조를 지탱하는 큰 축의 하나였다.

#고려의 운명을 이야기한 용손12진설(龍孫十二盡說)

14세기 말 고려 왕조의 멸망은 용손의 쇠멸을 뜻했다. 조선 전기에 서거정은 이에 대해 “김관의와 민지가 고려 세계(世系)를 논하는데 ‘용손이라 이르고 당나라의 귀한 성[貴姓]’이라 한 것은 모두 허무맹랑한 것이다. 현종 때 황주량이 태조 이하 7대의 실록을 편찬하는 데에도 한 마디 언급이 없는데, 김관의와 민지가 수백년 뒤에 황주량이 저술하지 않은 것을 책에 실었으니 더욱 의심스럽다. 만약 이 말과 같다면, 고려 태조가 자기의 증조를 조상으로 모시지 않고 도리어 증조모의 아버지를 조상으로 모시며, 또 아버지를 고(考)라 하고 딸을 비(죽은 어머니 비)라 하였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비판하고 있다. 용손은 부정은 곧 고려왕조의 부정으로, 조선 건국세력들의 이런 이해는 보다 적극적이었고, 권근은 “용손의 운이 다하면 선리(仙李)가 꽃 피운다”라는 예언을 이용하여 조선 건국을 정당화 하였다.

그런데 용손의 나라였던 고려왕실의 운명이 이미 고려시대에 쇠하였다는 참언들이 만연하였다. 고려 건국을 예언했던 당나라 상인이라는 왕창근은 “용의 아들이 3*4대에 걸쳐 6갑자를 서로 이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3*4는 12대를, 6갑자는 120년부터 360년까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11대 국왕이었던 문종이 예성강 남쪽에 장원정이란 정자를 짓고 땅의 기운을 북돋았거나, 이후 국왕들이 개경 근처에 별경, 이궁, 가궐 등을 짓거나 천도의 논의를 지속한 것은 모두 “용손이 12대가 되면 세를 다할 것”이라는 ‘용손12진설’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 예언은 12세기 초에 ‘십팔자(十八子)=목자(木子)=이(李)’씨가 왕이 된다는 ‘십팔자지참(十八子之讖)’ 내지 ‘목자득국참(木子得國讖)’과 연결되어 변혁을 요구하였다. 예종과 인종의 장인으로 정권의 실세였던 이자겸, 명종 때 무인 집정자로 반역의 뜻을 품었던 이의민 등은 이를 근거로 난을 일으켰다.

이제 용의 후손이라는 관념은 더 이상 고려왕실을 지켜주지 못했다. 왕실에서도 용손은 하나 둘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왕권에 정면 도전하기도 했다. 몽고에 항전했던 삼별초가 강화를 떠나 제주도로 남행한 배경에도 “용손 12대가 끝나고 남쪽으로 가면 황제의 도읍(帝京)을 이룰 수 있다”는 참설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사실상 몽고와의 관계에서 부마의 나라로 위치가 지어지며 몽고 황실의 피를 받은 존재들이 왕위 계승권을 가지게 된 13세기 후반부터 용손 관념은 무의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왕실은 여전히 ‘용손’의 신성 관념을 유지하려 했다. “고려 국왕은 백대의 용손(龍孫)이자 만승천자의 부마(駙馬)”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하지만 용손을 둘러싼 이 같은 신성관념은 더 이상 고려사회를 지탱할 수 없었다. 마침내 ‘십팔자=목자=이’씨의 나라가 세워졌다. 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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