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년 마진(摩震)의 국왕 궁예는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치고 나라의 이름을 ‘태봉(泰封)’으로 정했다. 800년대 이후 신라의 정치는 소수 귀족만을 위한 것으로, 백성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여러 혁명가들이 등장하게 됐다. 그중의 한 명이 궁예였고, 그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대동방국(大東方國)’이란 의미가 담긴 ‘마진’이란 국호로 새로운 나라를 창건한 것이다. 그랬던 궁예가 몇 년 지나지 않아 ‘천지가 어울려 한 마음으로 가득한 제국’이란 뜻과 극락세계란 의미가 들어 있는 ‘태봉’으로 국호를 바꾼 것이다. 국가의 이름을 바꾸면 정치체제 역시 백성들을 위한 것으로 변경했어야 했는데 궁예는 오히려 자신에 대한 우상 강화에 집중했다. 먼저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하고 머리에는 금책을 썼으며, 몸에는 비단으로 만든 방포(方袍)를 입고 큰 아들을 청광보살, 둘째 아들은 신광보살이라 불렀다. 국왕이 되기 전 궁예는 일반 백성들과 똑같이 남루한 옷을 입고, 허름한 밥을 먹었으며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 했는데 정 반대로 변한 것이다.

원래 궁예는 신라 경문왕의 서자로 음력 5월 5일 출생했다. 그런데 궁궐 안의 천문을 맡은 관리가 경문왕에게 “불길한 날 태어나서 임금에게 안 좋으니 비록 아들이지만 죽여야 한다”고 보고했고, 이후 임금의 시녀들이 갓난아기 궁예를 빼돌려 강원도 원주에서 몰래 키우게 된 것이다. 훗날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된 궁예는 불교에 귀의해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공부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세상에 나와 원주의 양길에게 의탁해 그의 장수가 되었다가 마침내 지도자가 된 것이다. 그가 지도자가 되었을 때만 해도 강릉 일대의 백성들이 스스로 찾아와 궁예를 나라의 왕으로 모시겠다고 할 정도였다. 그렇게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궁예가 권력의 정점에 서자 자신의 과거를 잊고 오만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태봉의 국왕인 궁예는 궁궐 밖으로 행차 할 때 항상 백마를 타고 말머리와 꼬리를 비단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또 15세 미만의 아름답게 생긴 어린 남자아이와 어린 여자아이들로 하여금 깃발, 일산, 향(香), 꽃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게 했고, 비구 200여 명을 시켜 범패를 부르며 뒤 따르게 했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는 물론 신라의 패악한 국왕들도 한 적이 없는 해괴한 일이었다. 본래 국왕의 행차는 백성들의 삶을 살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한 것인데 오히려 자신을 우상화하기 위해 어린 남녀까지 동원해 꽃을 뿌리고 노래를 부르게 하니 백성들은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궁예는 스스로 경전 20여 권을 지었는데, 그 말이 요망해 모두 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더구나 궁예는 자신이 지은 경서에 대해 여러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강의한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 승려 석총(釋聰)이 “이는 모두 사설 괴담으로 가히 가르칠 것이 아니다”라고 하자 그를 불러 철추로 때려 죽였다. 백성들의 삶을 위해 모두가 평등한 나라인 용화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던 궁예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궁예 대신 덕이 많고 인자한 왕건에게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고, 백성들은 그로 하여금 새로운 나라를 만들게 했다. 결국 궁예는 철원 명성산 일대에서 백성들에게 돌에 맞아 죽게 됐다. 아무리 권력이 강하고 자신을 신(神)과 같은 존재로 우상화했다 하더라도 민심이 떠나면 패망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 한 대기업 회장이 궁예처럼 행차를 할 때 동남동녀가 나와 인사를 하게 했다는 뉴스가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바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박삼구 회장이었다. 여기에 아시아나항공 승무원 교육생들이 박 회장을 위해 ‘기쁨조’를 연상케 하는 행사를 강요받아 왔다는 증언까지 나와 논란이 일고 있다. 회사 측은 직원들에게 가요 ‘장미의 미소’를 개사해 박 회장에 대한 ‘찬양가’를 부르게 하고, 율동을 추며 포옹과 악수를 강요했다던 것이다. 아시아나 간부들 역시 매달 반복적으로 회장의 입맛에 맞게 노래를 개사하고, 울거나 때로는 안기며, 달려가서 팔짱 끼어야만 했다고 한다. 이는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삼구 회장만이 아니라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을 가진 이들은 궁예의 몰락을 기억하며, 더 이상 이런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그 누구에게든 강요하지 않기를 바란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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