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1년 1월 18일 오후, 국왕 정조는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고 창덕궁으로 돌아가고자 한강을 건너 숭례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신의 행차를 보고자 하는 백성들을 막지 않는 정조의 생각 때문에 그의 행차 시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나와 구경하는 것이 하나의 풍속이 됐다. 이때 갑자기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한 사람이 구경 대열에서 튀어나와 정조의 행차를 가로 막았다. ‘격쟁(擊錚)’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백성들이 꽹과리나 징을 쳐서 국왕의 행차를 막고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격쟁을 하면 정조는 3일 안에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격쟁을 건 사람은 흑산도 사는 백성 김이수(金理守)였다. 그는 “흑산도에 부과된 잘못된 세금을 철회해 달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조선이 건국 된 후 조정은 각 지역마다 특산물을 세금으로 바치게 했다. 이를 ‘공납’이라고 하는데, 가령 경상도 상주는 곶감이 유명하고 충청도 한산에는 모시가, 연평도는 꽃게가 유명하니 이러한 특산물을 세금으로 바치게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흑산도에 존재하지도 않는 닥나무가 특산물로 지정돼 이곳 주민들을 해마다 닥나무를 다른 곳에서 구입해 조정에 바쳐야 했다. 닥나무는 종이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재료로 아무 곳에서나 자라지 않는 귀한 나무였다. 사실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흑산도에 닥나무가 자랐다. 하지만 흑산도 성인 남자는 40근의 닥나무를 바쳐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사람들이 생업을 포기하면서까지 서로 닥나무를 베다 보니 시간이 흘러 닥나무는 흑산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그래서 흑산도 백성들은 정작 섬에는 한그루도 없는 닥나무를 바치기 위해 돈을 모아 외지에서 닥나무를 사다가 바쳐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잘못 돼도 너무나 잘못된 행정이었다.

흑산도 주민들은 1772년(영조 48)과 1783년(정조 7), 나주 관아에 이러한 모순점을 해결을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당시 흑산도가 나주목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주관아의 담당 관리는 흑산도 백성들의 억울한 내용을 접수조차 하지 않았고, 조정에서는 흑산도의 문제를 전혀 알지 못하게 됐다. 그러자 김이수는 전라감영을 찾아가 문제점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오래된 세금 규정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관리들의 답변도 한결 같았다. 이에 흑산도 백성들은 분노했고, 전라감영이 해결 못한다면 임금에게 호소해야 한다는 생각에 김이수를 정조의 수원 행차에 맞춰 한양으로 올려 보냈던 것이다. 정조가 백성들의 억울한 소리를 직접 듣고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소문이 흑산도에까지 퍼졌기 때문이다.

외딴섬에서 천신만고 끝에 한양에 올라온 김이수는 이날 정조에게 자신들의 기가 막힌 사연을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은 후 정조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는 단순히 흑산도 지역의 특산물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국가의 세금부과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를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조정의 공식 논의로 올려 토론하고 해법을 제안하게 했다. 조정은 결국 3개월간에 걸친 현장조사와 오랜 토론 끝에 흑산도에 부과한 닥나무 공납은 잘못된 세금이라고 결정하고 이를 철폐했다. 비록 나라의 세수가 줄어든다 하더라도 백성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그것이 진정 올바른 것이라는 정조의 ‘손상익하(損上益下)’ 정신이 반영된 것이다. 흑산도 백성들의 용기 있는 행동과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정조의 현명한 판단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문재인 정부에 들어서 현대판 격쟁이라 할 수 있는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는 매일 기가 막힌 사연들이 올라온다. 여기에 문 대통령은 예고 없이 호프집 등을 깜짝 방문해 자영업자, 중소기업 대표, 청년구직자, 경력단절여성 등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모습이 뉴스에 회자되기도 했다. 물론 이런 것들이 ‘깜짝쇼’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청와대 국민청원과 대통령의 번개 미팅 등은 민원인의 답답한 속을 시원하게 해주거나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주어 좋은 이미지를 안겨줄 수는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의견이 과연 얼마나 실제 국정운영에 반영되느냐 하는 것이다. 요즘 다들 경제가 어렵다고 한다. 서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경기부양정책이 나오길 기대한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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