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대부분 잊었을지 모르겠다. 나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수원 지동시장 여성 살해사건’에 대해서다. 많은 사람의 가슴 깊은 곳에 상처를 입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잊을 수 없다. 사건 직후 대부분의 언론은 초기대응에 실패한 경찰을 질타했다. 내 관심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언론이 죽음에 주목했다면, 나는 피해여성의 삶에 주목했다.

살해되기 전 그녀의 삶을 들여다봤다. 피해여성은 주말에도 일을 했다. 휴대폰 케이스를 생산하는 공장의 비정규직 노동자였던 그녀는 주7일을 근무했다. 사건이 일어난 것도 일요일 밤이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피해여성은 마을버스 차비를 아끼기 위해 캄캄한 골목길을 걸어서 귀가하던 중이었다. 그렇게 일해서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은 170여 만 원이었다. 월급의 대부분은 카드빚에 쪼들리는 시골부모에게 보내드렸고, 얼마간 남은 돈으론 남동생을 챙겼다. 이따금 찾아오는 남동생에게 용돈을 주기 위해 정작 자신은 마을버스 차비조차 아끼며 살았다.

더 충격적인 건 겨우내 외투 하나 사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몇 개월 동안 같은 옷을 입고 늦은 시간 골목길을 걸어가는 그녀를 오래전부터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살인범이었다. 범인은 일찌감치 그녀를 범행대상으로 점찍었을 것이다. 우발적인 범죄가 아니었다. CCTV의 기록을 통해 확인됐다. 밤마다 같은 옷을 입고 골목길을 지나는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소금꽃나무>의 저자 김진숙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쩌자고 그때 그녀의 나이 스물여덟 살이었다.” 죽어라 일하고도 정작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버스차비조차 쓰지 않던 스물여덟 살 처녀. 한창 멋을 부릴 나이, 부모나 남동생이 아닌 자기 자신의 미래를 꿈꾸었어야 할 여성이었다.

내 청춘의 기억 속에도 그런 누나가 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낮엔 공장, 밤엔 야학에 다니던 시절 야학에서 만난 누나다. 야학의 고등부 누나들은 대부분 집안의 가장이었고, 적어도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책임지는 억척스런 생활인이었다. 그 중 미영이 누나를 잊을 수 없다. 누나 역시 스물여덟 살이었다. 누나는 초등학교를 중퇴한 뒤 10대 초반부터 공장생활을 시작해 시다와 미싱사 보조를 거쳐 미싱대에 오른 지 10여년이나 되는 베테랑 미싱사였다.

손 빠르고 부지런한 누나였으니 돈벌이도 제법 쏠쏠했을 것이다. 그런 미영이 누나에게 이상한 점이 있었다. 한 겨울이 다 지나도록 새 옷을 입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같은 외투를 입고 다녔고, 이따금 갈아입는 외투는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몸에 맞지 않아 엉성해 보였다.

언젠가 야학 입구에서 남동생과 함께 있는 미영이 누나를 본 적이 있다. 초저녁이었지만 술에 취한 남동생은 누나에게 연신 짜증을 내고 있었다. 누나는 곧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동생을 달래고 있었다. 슬쩍 옆에 가서 들어 봤다. 가관이었다. 다짜고짜 돈을 요구하는 남동생에게 누나는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평소 미영이 누나가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던 바로 그 남동생이었다. 공부 잘해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는 동생, 집안의 자랑이며 기둥이라는 든든한 동생, 누나 걱정을 끔찍이 해준다고 늘 입버릇처럼 자랑하던 그 착한 남동생이었다.

내게도 누나가 있다. 엄마는 나를 가르치기 위해 누나의 상급학교 진학을 만류했다. 일찍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누나는 공장노동자와 보조 보육교사 등을 전전한 끝에 서둘러 출가해 가정을 이루었다. 그 누나가 여주에 산다. 환갑을 바라보는 누나에게 나는 영원히 속 썩이는 남동생일 뿐이다. 누나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곤 한다.

지동시장 여성 살해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1970년대와 80년대 산업현장을 누비던 누나들이 떠오른다. 야학의 미영이 누나와 내 누님이 그 속에 있다. 그분들 덕분에 우리가 지금 이나마 살고 있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곧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다는 21세기 대한민국에도 여전히 그런 누나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36년 전 야학에서 만났던 미싱사 누나와 6년 전 끔찍한 뉴스로 접했던 여성에겐 공통점이 있다. 스물여덟 살이었다. 노동자였다. 자신을 위해서는 버스비조차 허투루 쓰지 않았다. 겨우내 외투 하나로 버텼다. 늦은 밤에도 마을버스를 타는 대신 걸어 다녔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저축을 하고 부모를 챙기고 남동생에게 용돈을 쥐어줬다.

그 많던 누나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으로 살고 있을까.

최준영 작가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