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8월 9일 일본으로 항해 중이던 메이지마루(明治丸) 호에서 고종의 명을 받은 수신사 박영효가 제임스 선장과 깊은 논의를 하고 있었다. 이들 주변에는 부사 김만식, 종사관 서광범, 민영익, 김옥균 등 14명이 함께 있었다. 이들이 심각하게 논의하는 것은 다름 아닌 조선의 국기 제정 문제였다. 박영효는 임오군란의 뒷수습 때문에 일본으로 가던 중이었다. 일본은 임오군란의 주모자를 잡아 처형하고 손해배상금 50만 원을 물어야 하며, 특사를 파견해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고종은 철종의 부마였던 금릉위 박영효를 수신사로 선발해 일본으로 보낸 것이다. 그런데 수신사 일행은 출장비 5천 원이 없어 일본 정부에 관세 수입과 조선의 금광을 담보로 돈을 빌려 길을 떠났기에 매우 참담한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고종의 명으로 외교 문제 해결은 물론, 국기까지 만들어야 하는 중책을 맞게 됐다.

당시 조선은 서구 열강과 접촉이 잦아지고 1875년 강화도사건으로 일본과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한 이래 국기 제정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1880년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전해진 이후 국기 제정 논의가 진행되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국기를 만들지 못했고, 대신 1882년 4월 6일 조미조약 체결 당시 미국전권대신 슈펠트(Robert W. Shufeldt)의 권고로 이응준이 국기대용 깃발을 제작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당시 이응준이 만든 기는 일본기와 혼동을 할 수 있는 모양이어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청나라 외교관인 마건충(馬建忠)은 조선의 고위 관료인 김홍집에게 백색 바탕에 청색 구름과 홍색용이 그려진 ‘백저청운홍용기(白底靑雲紅龍旗)’를 제시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고종은 조선의 국가 체모와 사상이 담긴 정식 국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수신사로 떠나는 박영효에게 국기 제작을 해 일본 정부에 대응하라는 지시를 했다. 고종은 음양과 8괘를 기반으로 해서 국기를 제정하기를 희망했다. 음양오행의 원리와 8괘는 동양 사상의 핵심이며, 동양고전 중 가장 심오한 경전으로 평가받는 주역(周易)의 기반이기도 했다. 자연과 우주의 원리를 근간으로 하는 음양과 8괘는 너무도 수준 높은 것이다. 실제로 조선의 태극기처럼 우주와 자연의 원리를 담아 국기를 제작한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우리 태극기가 전 인류사에 있어 가장 심오한 사상을 담은 국기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 박영효는 음양의 상징하는 태극을 가운데 두고 8괘를 모두 그리고자 했다. 하지만 국기 제정 자문을 하던 영국인 선장 제임스가 “태극ㆍ팔괘의 양식은 특별히 눈에 뜨이지만 팔괘의 분포가 자못 조잡해 분명하지 못해 보일 수도 있고, 또 각국이 이를 모방·제작하기도 매우 불편하니 4괘만 사용해 네 모서리에 긋는다면 더욱 아름다울 것”이고 말했다. 결국 당시 23살의 박영효는 자신보다 경험이 많은 제임스의 의견을 듣고 건곤이감(乾坤離坎)의 4괘만을 사용했다. 태극은 우주자연의 궁극적인 생성원리를 상징하며, 빨간색은 존귀와 양(陽)을 의미하고, 파란색은 희망과 음(陰)을 의미하는 창조적인 우주관을 담고 있다. 4괘 중 건괘(乾卦)는 우주 만물 중에서 하늘을, 곤괘(坤卦)는 땅을, 감괘(坎卦)는 물을, 이괘(離卦)는 불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태극기는 1875년 강화도 운양호 사건 이후 몇 년 간의 고뇌 끝에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탄생됐다. 박영효는 이 태극기를 같은 해 8월 14일 고베의 숙소인 니시무라여관(西村旅館)에 내 걸은 뒤 8월 22일 국기 제정 사실을 조선의 기무처(機務處)에 보고했고, 이후 조선의 공식 국기로서 각국 나라의 행사장에 펄럭이게 됐다. 그런데 이처럼 우주 자연의 원리를 담아 만든 세계 최고의 국기인 태극기가 오늘날 너무 홀대 받는 것 같아 안타깝다. 국민들의 태극기에 담긴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갈수록 가정에서의 국기 게양율은 떨어지고, 심지어 일부 정치 세력의 선전 도구로 활용되면서 혐오감까지 갖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주 2018 아시안게임이 시작됐다. 앞으로 시상대 위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며 국민들이 모두 환호하고 국기에 대한 위상 역시 제자리를 찾았으면 좋겠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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