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6월 인천 포구에 영국 군함 플라잉후이스호의 선원들이 내렸다. 아시아 일대의 식민지 건설을 위해 중국 마카오를 지나 조선의 바다로 온 이들은 물과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인천 땅을 밟은 것이다. 선원들은 물과 식량을 챙기면서 쉬는 시간에 포구의 마당에 둥근 공을 가져와 차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탄생한 ‘축구’가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영국 군함과 선원들을 보기 위해 몰려든 조선인들은 난생 처음 보는 경기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경기가 끝나자 영국 선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놀던 공을 조선인들에게 던져준 뒤 배를 타고 다시 서해 바다로 나갔다. 이 공을 건네받은 주민들은 공을 차며 놀이를 했고 자연스레 축구 경기가 전파됐다.

당시 고종은 개화의 시대적 흐름을 아주 무시하지는 않았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조선을 힘없는 국가로 만든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청나라와 일본과의 외교뿐만 아니라 서양과도 관계를 맺기 위해 이들과 통역할 수 있는 역관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개화기의 궁중어전통역관(宮中御前通譯官)이었고, 1896년 관립 외국어 학교를 나온 어전 통역관들이 ‘대한축구구락부’를 처음으로 조직했다. 구락부(俱樂部)는 영어의 클럽(club)을 일본식으로 음역한 것으로,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통역관 일부가 외국의 사례를 참고해 일종의 축구팀을 만든 것이다. 이것이 한국 근대 축구팀의 효시였다.

이후 1902년 배재학당에서 축구단이 만들어졌고, 1906년 3월에는 궁내부 예식원 주사인 현양운(玄暘運) 등 30여 명이 대한체육구락부를 조직해 일정한 경기규칙 없이 축구경기를 했다. 당시 축구 선수들은 경기장에 입장할 때 모두 갓을 벗었다. 다만 상투 머리가 흐트러지므로 머리를 죄는 망건까지 벗는 사람은 없었다. 저고리 앞자락이 나풀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조끼나 마고자 안쪽에 입는 배자 역시 반드시 입었다. 경기에서 양 선수의 분별은 조끼 빛깔 또는 배자로 제복을 삼아 구별하거나, 한 선수단이 조끼를 뒤집어 입게 했다. 그리고 대부분 바지를 걷어 올리고 짚신을 신었으나, 개중에는 외국인에게 얻은 운동화를 신은 사람도 있었다. 양쪽 선수단의 인원은 제한이 없었고 다만 양측의 인원이 같기만 하면 됐다.

그 당시 축구 경기는 보통 15명 내외가 뛰었다. 제대로 된 경기규칙이 없었기에 축구 골대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고, 사이드라인이나 골라인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양쪽에 돌을 놓고 그 안으로 공이 들어가면 득점으로 인정했고, 공이 골키퍼의 머리 위를 넘어가도 득점으로 간주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공을 멀리, 높이 차는 선수가 축구를 가장 잘하는 선수로 인정받았다. 경기 시간제한도 없어 쌍방이 심하기 지치거나 어느 한쪽이 백기를 들면 그것으로 경기는 끝났다. 만약 승부가 안날 경우에는 어느 쪽에 더 벌칙이 많았는가에 따라 승패를 가렸다.

축구가 서서히 조선 백성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경기 수가 늘어나자 규칙을 둘러싼 시비가 자주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 양쪽 선수단과 응원단의 싸움 역시 거세지자 대한축구구락부는 급기야 일본 아사히신문사가 발행한 운동연감에 실려 있는 축구규칙을 번역·배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1922년 7월 중국 상하이 거주 동포의 축구단이 내한해 처음으로 제대로 된 규칙을 적용한 경기를 진행하게 되면서 현대 축구로 발전하게 됐다. 축구가 큰 인기를 끌면서 ‘조선의 싸나이거든 풋볼을 차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고, 조선의 풋볼인 축구는 독립의지를 불태우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최근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중 축구경기가 월드컵만큼 연일 화제를 모았다. 우리나라 대표 팀은 약체 팀과의 경기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기도 하고, 어려운 고비에서 투지를 불태운 덕에 드라마와 같은 대역전극을 펼치며 국민들에게 큰 기쁨을 선사하기도 했다. 우리와 4강에서 맞붙은 베트남 역시 마찬가지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주역이자 베트남 국민들의 총애를 받고 있는 박항서 감독 덕분의 ‘매직’ 덕분에 우리는 또 한 편의 명승부를 볼 수 있었다. 승패를 떠나 양 팀 모두 잘 싸웠고, 이들 모두 대한민국 축구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무척 자랑스럽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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