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8년(영조 4) 3월28일 병조에 근무하는 권익순이 병조의 전체 의견을 담아 영조에게 특별 장계를 올렸다. “새로 제수된 내금위장 장태소(張泰紹)는 금군 별장 이징휴(李徵休)와 처남 매부 사이로 상피(相避) 관계에 있다고 합니다. 상피하는 법에 따르면 아랫사람을 바꾸어야 하니, 내금위장 장태소를 우선 교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국왕을 직접 호위하는 내금위장 장태소와 내금위를 총괄하는 정2품 별장의 보직을 받은 이징휴가 처남 매부지간의 인척이기 때문에 한 부서에 같이 근무해서는 안 되는 상피제도에 따라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전출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조는 권익순의 의견에 동의하고 이를 윤허했다.

내금위장 장태소는 훈련대장 장붕익의 아들이었다. 젊은 시절 장태소는 아버지와 같은 무장이 되기보다는 문과에 급제해 문신(文臣)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영조는 조선 최고의 장수인 장붕익의 아들이 무장이 되려고 하지 않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라고 생각, 문과 초시에 합격한 장태소의 합격을 취소하고 무과에 응시하도록 특별 지시를 내렸다. 이처럼 영조는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알아보고 장태소를 무장으로 키우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무과에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는 시험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장태소와 친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무과 시험관으로 임명하지 않았고, 무과에 합격한 뒤에도 아버지 장붕익 밑으로 보내 근무시키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바로 세종대에 만들어진 ‘상피제도’를 지키고자 함이었다.

상피제는 권력의 집중·전횡을 막기 위해 부자, 형제, 삼촌과 조카, 사돈 지간 등 일정 범위 내의 친족 간에는 같은 관청 또는 통속관계에 있는 관청에서 근무할 수 없게 한 제도를 말한다. 세종은 1428년(세종 10) 2월 예조에서 건의한 상피제를 받아들여 이를 규범화 했다. 그리고 특히 무과 시험에서 상피제를 엄격하게 적용했다. 말을 타는 자세나 활쏘기 자세에 대한 평가, 무기 운용에 대한 평가 등은 모두 주관적일 수 있기 때문에 무과 시험 감독관을 뽑을 때 응시자의 친인척은 무조건 배제 시켰다. 심지어 세종은 상피제의 원칙을 국가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기록하게 했다. 이러한 전통이 영조까지 이어진 것이고 장태소 역시 영조가 아끼는 젊은 무장임에도 불구하고 공명정대하게 무과 시험을 치르게 한 것이다.

조선시대 상피제도는 비단 시험이나 관직 임명 시에만 적용됐던 것은 아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상피제를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가령 이순신 장군의 경우 덕수 이씨였는데 조선 최고의 명망가이자 선조의 스승이었던 이조판서 율곡 이이도 덕수 이씨였다. 당시 이순신은 비록 정8품의 낮은 직급인 훈련원 봉사 신분이었지만, 군문(軍門)에서 여론이 좋아 율곡은 그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런데 국왕과 삼정승 아래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이조판서가 자신을 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만약 제가 판서를 만난 뵌다면 승진을 청탁하는 것으로 비취질 수 있으니 절대 만나지 않겠습니다. 만약 대감께서 이조판서를 그만 두시거나 아니면 제가 훈련원 봉사를 그만 두고 평범한 백성이 된다면 그때 만나시지요”라며 편지를 보냈다. 조선 시대의 유교질서와 직급차이로 봤을 때 이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정도로 이순신은 관료생활을 하는 동안 혹여 생길 수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스스로 상피제를 지키려 노력했다. 수많은 당쟁과 탐관오리들의 발호 속에서도 조선이 500여 년간이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상피제를 지킨 국왕과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는 상피제도의 의미와 기능이 너무나 쇠퇴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최근 강남의 한 여고에서 전교 1등을 한 쌍둥이의 아버지는 바로 이 학교의 교무부장이었고, 해당 교사는 자녀들이 입학한 이후 2년간 내신시험 문제지·정답지를 6차례에 걸쳐 검토·결재한 것으로 조사됐다. 허재 감독은 두 아들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시켰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는데, 농구협회는 결국 형제 모두를 농구대표팀서 제외시켰고 허재감독 본인도 감독직을 사임했다. 물론 두 사례 모두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상피제 취지까지 언급하지 않아도 선조들이 왜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라’고 했는지 현대인들은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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