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2년(광해 4) 12월, 한양과 경기도에 갑자기 역병(疫病)이 발생했다. 이는 함경도에서 처음 시작된 것인데, 함경도와 맞닿은 강원도로 번졌다가 아예 조선 전역으로 퍼진 것이다. 보다 근원적인 원인을 따진다면 이 당시 역병은 두만강 건너 중국 땅에서 발생한 것이 함경도로 번진 것이다. 역병이 발생하자 조정에서는 심각성을 느끼고 국왕이 주재하는 어전회의를 통해 역병의 퇴치에 대해 논의했다. 조선 8도의 관리들로부터 역병 피해에 대한 보고를 받은 승정원에서는 역병이 멈출 것 같지 않다고 광해 임금에게 보고하고 나름의 대안을 모색했다. 그것은 바로 ‘벽온방(?瘟方)’이란 의서를 전국의 백성들에게 보급해 역병을 예방하거나 치료케 하자는 것이었다.

벽온방은 세종의 지시로 만든 의서로, 온열(溫熱)로 인해 발생한 역병의 치료법을 담은 책이었다. 이러한 질병을 ‘온역(溫疫)’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의 급성전염병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원래 벽온방은 몇 장 되지 않는 얇은 의서였는데, 한문으로 돼 있어 백성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1518년(중종 13) 김안국(金安國)은 이 책을 한글로 번역해 ‘언해벽온방(諺解?瘟方)’을 편찬했다. 세종 대에 만들어진 책이 중종 대에 와서 일반 백성들도 이해할 수 있는 예방 의학서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광해 임금은 승정원으로 하여금 벽온방을 교서관(校書館)에서 다량으로 빠르게 인쇄해 전국에 보급시켜 위급한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다. 특히 역병이 발생한 지역은 어쩔 수 없으나 아직 발생하지 않은 지역은 벽온방에 나오는 예방법을 바탕으로 최대한 발병을 억제하고자 한 것이다.

고려시대나 조선 초기에는 역병이 발생하면 조정에서 약재를 보급해 치료하기 보다는 군기감(軍器監)에서 궁궐의 중요한 전각에 화약(火藥)과 폭죽을 설치해 이를 터뜨려 역병을 쫓는 행동을 하곤 했다. 여기에 불화살까지 쏘아 역병의 병균들이 하늘로 날아가라고 기원했다.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어찌 역병을 사라지게 할 수 있겠는가?

이에 반해 광해 임금은 벽온방 인쇄·보급과 함께 급한 대로 약재를 최대한 모아 질병이 심한 지역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또 질병 환자가 사망할 경우 남은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식량을 보급했고, 이들 가정에는 이듬해 내야 할 모든 세금을 감면해 주었다. 가난한 백성들이 역병으로 인해 가족을 잃었는데, 여기에 무거운 세금까지 매기는 것은 이중의 고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역병에 걸려 신음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역병이 가장 심했던 함경도의 경우 병에 걸려 채 한 달도 안 된 사이에 죽은 백성들이 무려 2천900여명에 이르렀다. 더구나 국왕은 역병을 해결하기 위해 매일 노심초사 하고 있는데 해당 관리들은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역병에 걸린 백성들이 엄청나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관원들은 역병을 구제하려고 하다가 자신들이 역병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 문서로만 역병치료를 실시했다고 거짓 보고를 한 것이다. 이에 분노한 광해는 거짓 보고를 한 관원들을 대상으로 승정원에서 진상 조사케 하고 그들의 죄를 엄하게 다스렸다. 이처럼 광해 임금의 강력한 대응으로 그해 12월 말 역병은 사라지게 됐다. 그러나 역병으로 인한 백성들의 죽음과 국가적 재정 손실은 너무나도 컸다.

최근 국내에서 3년 만에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MERS) 환자가 발생해 국민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2015년 5월 바레인에서 귀국한 첫 번째 감염자가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대한민국 메르스 유입이 확인됐고, 초기 대응에 미흡했던 보건당국과 일선 병원의 방역망이 뚫리면서 감염자가 점점 늘어나다가 3개월 만에 사망자 36명, 확진자 186명이 발생한 사례를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더구나 당시 보건당국은 국민들의 과도한 불안이나 오해를 막는다며 메르스 관련 정보를 의료진에게만 공개했다가 큰 불신만 키웠다. 현 정부와 각 지자체에서는 3년 전의 사태를 거울삼아 나름대로 신속한 대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고 메르스가 조기에 종식돼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김준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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