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이씨 시조 이도(李棹) 묘는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유천리 599-1(양안이길 14)에 위치하고 있다. 이도의 처음 이름은 이치(李齒)였다. 충남 공주 출신으로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정벌하려 공주에 이르렀을 때 홍수로 금강이 범람하였다. 도저히 진군이 불가능하여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때 배를 만들어 도강을 주도한 인물이 이치다. 견훤을 물리친 왕건은 이치의 공로를 높이 사 배의 노라는 뜻의 도(棹)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도는 말년에 전의현에 운주산성을 쌓고 살다가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 그 뒤 후손들이 전의를 본관으로 삼았다.

이도의 선조 묘와 관련된 유명한 전설이 있다. 그의 선조는 공주 금강의 뱃사공이었다고 한다. 언제나 친절하게 손님을 모셨고 그렇게 번 돈으로 공주일대의 가난한 사람들과 거지들을 돌보아주었다. 어느 날 승복을 걸친 늙은 중이 와서 급히 강을 건너달라고 하였다. 뱃사공이 노를 저어 강을 건너 주자 스님은 내리지도 않고 다시 되돌아가자고 하였다. 이러기를 하루 종일 하였다. 화가 날만도 한데 뱃사공은 싫은 내색한번 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님은 소문대로 배사공이 덕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감탄하였다.

사실은 스님은 배사공의 덕을 실험해본 것이다. 또 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명당을 찾았다. 마침 공주강 북쪽 산중턱에 있는 명당을 찾아 뱃사공에게 알려 주었다. 그 자리에 아버지 묘를 쓰면 후손이 번창하여 부자가 되는 것은 물론 귀한 자손이 많이 배출될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훗날 어설픈 지관이 와서 이장을 권하는 일이 생길 터이니 절대 옮기지 말라며 무언가를 적은 표석을 하나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뱃사공은 스님이 일러준 대로 아버지 묘를 그곳에 이장하고, 후에 파묘하지 못하도록 회로 단단하게 다지고, 수님이 주고 간 표석도 묻었다. 세월이 지나 정말 후손들은 부자가 되었고 이치는 고려개국공신이 되었다. 또한 고려 때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많은 인물이 배출하였다. 광해군 때 박상희라는 유명한 지관이 있었다. 마침그 집을 찾아와 선조의 묘가 맥이 끊겨 나쁘다며 다른 곳으로 이장을 권하였다. 나라에서 인정하는 지관인지라 후손들은 묘를 이장하기 위해 땅을 팠다. 석회로 다져놓아 잘 파지지 않았다. 얼마만큼 팠을 까 표석이 하나 나왔다. “남래요사박상희 단지일절지사 미만대영화지지(南來妖師朴相熙 單知一節之死 未萬代榮華之地)”라고 쓰여 있었다. 즉 남쪽에서 온 요상한 지관 박상희가 단지 용맥 일절이 죽은 것만 알고 만대영화지지라는 것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박상희는 깜짝 놀라 도망쳤고 후손들은 다시 무덤을 원상태로 복구하였다. 그 무덤은 지금도 공주시 시목동 공주대교 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이도의 묘는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이다. 안성 칠장산부터 금강 북쪽으로 이어진 금북정맥이 고려산(304m)에서 국사봉(403m)으로 내려오다 장고개에서 한 산줄기를 반대편인 북쪽으로 뻗는다. 그리고 자기가 지나온 산맥을 바라보고 혈을 맺었다. 용이 돌아 조종산을 바라보고 혈을 맺는 것을 회룡고조혈이라고 한다. 산맥이 한 바퀴 돌기 위해서는 큰 기운이 필요하다. 회룡고조혈에 대혈이 많은 이유다. 이곳의 정좌계향(丁坐癸向)으로 북향이다. 북향에도 명당이 많은데 이때는 뒷산이 낮아서 햇볕이 잘 들어야 한다.

이곳 뒷산도 낮은 구릉으로 이어져 오는데 그 모습이 마치 호랑이 등처럼 생겼다. 묘가 있는 자리는 호랑이 머리이고, 이를 보호하는 내청룡과 내백호는 앞발처럼 생겼다. 전체적으로 호랑이가 사냥하기 위해서 엎드린 복호형(伏虎形)이다. 복호형에는 반드시 먹잇감이 있어야 한다. 묘 앞 경부선 철로 가에는 개를 뜻하는 구암(狗岩)이라는 작은 바위가 있다. 만약 이 바위가 없으면 발복이 안될 뿐만 아니라 호랑이가 사람을 해친다고 자손들은 믿고 있다.

일제가 전의이씨 위세를 꺾기 위해 경부선 철도공사를 하면서 구암을 깨뜨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전의이씨 전 문중에서 들고일어나 반대하는 바람에 철도를 곡선으로 돌렸다고 한다. 지금도 철도변에는 구암이 남아 있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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