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2년 8월. 신라의 김춘추가 평양을 방문했다. 고구려의 실질적 지도자인 연개소문을 만나기 위해서다. 당시 보장왕이 고구려의 국왕이었으나 그는 연개소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제거하고 보장왕을 내세웠기에 그에겐 아무런 힘이 없었던 것이다. 김춘추 역시 신라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그가 비록 진골 귀족으로 선덕여왕의 신하였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그에게 있었다. 신라 왕실에 성골은 ‘선덕’과 ‘진덕’으로 대표되는 여성들밖에 없었기에 김춘추는 장차 신라의 국왕이 될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더구나 군대를 통솔하는 김유신과는 사돈이자 친구지간이었기에 김춘추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따라서 남국의 신라와 북국인 고구려의 두 지도자 간 만남은 역사적인 회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양국 모두 국가적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백제로부터, 고구려는 당나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다. 백제 의자왕은 군사력을 키운 이후 신라의 국경을 공격해 대야성(현재 경상북도 합천)을 공격, 김춘추의 딸과 사위인 김품석을 죽였다. 하지만 김춘추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단순히 딸과 사위의 복수를 하기 보다는 고구려의 군사적 지원을 바탕으로 백제가 더 이상 신라를 넘보지 못하게 하고, 양국의 항구적 평화를 얻고자 연개소문을 찾았갔던 것이다. 이러한 김춘추의 의도를 알고 있던 연개소문도 자존심 때문에 차마 말하지는 않았지만, 장차 당나라와의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김춘추의 고구려 방문을 허락한 것이다. 신라와 당나라가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터여서 김춘추로 하여금 당나라가 고구려를 괴롭히지 않도록 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남과 북의 지도자의 만남은 연개소문의 지시로 거창하게 이루어졌다. 신라의 실권자를 맞이하는 것이었기에 고구려 최고의 국빈방문 예법으로 진행됐다. 비록 고구려와 신라가 통일은 하지 못하더라도 이번 만남을 통해 두 나라 모두 항구적인 평화가 이어지길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두 지도자의 환담 중간에 이상기류가 발생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 신라가 힘을 합쳐 백제를 치자고 제안했으나, 연개소문은 거꾸로 그를 윽박지르면서 “현재 신라 땅인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나라 땅이었다.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그대를 보낼 수 없다”라고 한 것이다. 이에 김춘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 나라의 땅을 어찌 일개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그런 명령에 따를 수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옥에 가두었다. 타국의 실권자를 옥에 가두어 인질로 삼는, 차마 있을 수 없는 외교행위를 한 것이다.

연개소문이 이렇게 한 것은 사실 땅을 돌려받기보다는 외교협상 자체를 깨기 위한 목적이 컸다. 양국이 평화 공존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개소문 정권 자체가 ‘당나라와의 대결’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통해 이뤄진 것이기에 만약 신라와의 협상을 통해 당과 화친하게 된다면 강성세력인 자신들의 입지가 장차 줄어들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춘추는 옥에 갇힌 뒤 꾀를 내어 연개소문에게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고구려의 땅입니다. 밝은 해를 두고 맹세컨대 신이 귀국하면 우리 왕께 청하여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하고 고했다. 이에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돌려보냈으나, 당연히 김춘추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연개소문과 김춘추의 협상이 결렬되면서 고구려와 신라는 완전한 적이 됐고, 김춘추는 바다 건너 당나라로 가서 동맹을 맺은 뒤 결국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두 나라의 평화적 공존이 이루어질 수 있는 중요한 순간에 연개소문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고구려의 멸망을 초래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8일 평양을 방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역사적인 정상회담에 돌입했다. 그리고 불과 하루 만에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9월 평양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북한 동창리·미사일 발사대를 영구 폐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두 정상이 정치적 득실 계산보다는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와 경제적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길 기대한다. 그리고 빠른 시일 안에 김 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한다고 하니 그 약속도 반드시 지켜지길 바란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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