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1월 2일,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방위량(邦緯良)’이란 우리 이름을 가진 미국의 블레어(Blair) 선교사의 주관으로 성경 강의를 하는 사경회가 개최됐다. 그가 한국으로 들어와 언어 습득을 마치고 평양, 안주 등 5개군을 관할하는 본격적인 전도사역을 한지 6년 만의 일이었다. 매일 저녁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약 1천 명 정도였다. 그런데 집회에 참석하려면 짧게는 16㎞, 길면 160㎞ 이르는 아주 먼 거리를 걸어야 했기에 2주간 사경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아주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선교사가 전하는 새로운 성경 이야기와 서양 문물에 대한 정보를 듣기 위해 주민들은 그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찾아온 것이다.

한말 열강들과의 통상교섭이 시작된 이래 평양은 선교사들이 집중적으로 파견되면서 미국과의 교류가 가장 활발한 지역이었다. 특히 1891년 북장로회의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t)이 평양에 선교지부를 설립한 이후 평양과 그 일대인 관서지방은 미국 선교사들의 활동 근거지가 됐다. 미국 북장로회가 평양에서 활발히 선교를 하고 문화교류를 하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이었다. 첫째, 19세기 말 조선 서북부는 청·일 전쟁으로 인해 고아와 난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을 돌 볼 선교사역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평양선교부에서는 부족한 인원을 충원하기 위해 미국 북장로회 선교본부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고, 이에 많은 선교사들이 평양과 관서지역으로 들어오게 됐다. 둘째,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관서지방은 서울 중심의 양반사회와 달리 자립적인 중산층이 많았기 때문에 미국 기독교 문화를 일찍 받아들이게 됐다. 평양 일대는 조선시대 내내 차별을 받아왔다. 이 지역 사람들은 오랫동안 북방민족에 맞서 싸우며 상당히 호전적이었는데 문예를 중시하는 조선의 중앙세력과 맞지 않았다. 또한 조선 초 세조가 김종서를 제거한 이후 관서지역에 있는 그의 추종자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아예 배척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세조는 관서지방 무사들의 무과 응시를 금지 시켰고, 후대 국왕인 성종은 이러한 세조의 명을 아예 경국대전에 기록하게 했다. 한참 뒤에 정조가 관서지역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였지만, 정조의 죽음 이후 관서 지역의 차별은 더욱 심해져 결국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차별 때문에 평양 일대에서는 양반 사족의 형성이 약했고, 아무리 글 공부를 열심히 해 과거에 합격한다 하더라도 관료로 출세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반면, 현실과 유리된 유교적 지식이나 형식에 거리를 두며 자신의 생계를 직접 꾸려 나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상공업에 종사하며 대청(代淸)무역과 상업을 통해 부의 축적을 이루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여겼다. 이러한 개방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기에 미국의 북장로교회가 기독교 신앙 전파를 했을 때 관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 부흥으로 당시 백성들은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1885년부터 1910년까지 설립된 장로교회의 683개 중 관서지방에 있던 것이 362개로 전체의 과반수를 넘는다. 아울러 한말 근대식 학교 설립도 관서지방이 가장 활발했는데, 1910년 7월 기준 전국 사립학교 2천82개교 가운데 장로교, 감리교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755교였으며 이중 과반수가 관서지방에 세워졌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평양 일대의 학교는 단순히 목회 및 전도자의 양성에 국한되지 않았고, 민족과 국가의 앞날을 짊어지고 나갈 지도자의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조만식, 안창호 등은 바로 이러한 교육을 받은 뒤 기독교를 기반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했고, 민족지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미국과의 관계가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 평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분단으로 인해 평양은 미국과 가장 적대적인 지역이 됐다.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주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갖고, 비핵화 방안에 대해 합의하면서 남북관계는 물론, 북미 관계가 한층 진전되고 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핵실험을 중단한 것과 관련해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다. 하루 속히 북한과 미국이 종전선언에 합의하고 과거처럼 다시 경제와 문화교류를 추진하길 기대한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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