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채씨 채신보와 채수 부자의 묘는 충북 음성군 원남면 삼용리 639-7(덕생로 33번길 114-6) 마을 경로당 뒷산에 위치한다. 마을 앞에서 보면 두 개의 작은 봉우리가 보인다. 계단이 있는 왼쪽 봉우리에는 아버지 채신보 묘, 오른쪽 봉우리에는 아들 채수와 그 후손들 묘가 있다. 주변 경치는 산자수명(山紫水明)이란 글귀가 절로 떠올려질 만큼 매우 아름답다. 이곳이 고향인 채신보(1420~1489)는 벼슬에서 물러나 소산정사를 짓고 여생을 보내다 이곳에 묻혔다.

이 묘에는 호환(虎患)과 관련된 유명한 전설이 있다. 후손들이 성묘 길에 나서면 일행 중 한 사람은 반드시 호랑이에게 잡혀갔다고 한다. 이런 일에 계속되자 후손들은 성묘 가기가 두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지관이 “관운은 좋겠으나 호환을 막을 수 없겠구나!”라며 탄식하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들은 후손이 그 이유를 묻자, 산의 형세가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복호형인데 묘가 머리 앞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뒤로 후손들은 묘 가까이 오지 않고, 묘가 보이는 먼 곳에서 망배만 하고 돌아간다는 것이다.

전설이 사실일까 해서 이곳 마을에 사는 후손에게 물은 적이 있다. 후손은 사실무근이라고 하면서, 다만 문경에 후손들이 많이 사는데 이곳으로 성묘 오려면 험준한 문경새재를 넘어야 했다. 걸어서 3~4일씩 걸렸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 지역에 호랑이가 많이 살았으므로 그만큼 호환의 위험이 있기 마련이다. 인천채씨 집안사람들은 성묘 길이 그렇게 위험했음에도 조상을 극진히 섬겼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복을 받았는지 조선시대 때 문과급제자만 76명을 냈다.

채신보의 아들 채수(1449~1515)는 세조 14년(1468) 생원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추장시 문과에서 초시·복시·전시를 모두 장원하였다. 조선 500년 동안 과거 삼장에 연이어 장원한 사람은 연안이씨 저헌 이석형과 채수 두 사람 밖에 없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글을 잘했으면 글 잘하는 사람을 가리켜 ‘채 문장 같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일화에 의하면 채수가 승지로 있을 때 당대 문장가인 성현과 금강산을 유람을 하였다. 돌아오던 길에 한 고을에 이르니 마침 지방 수령들이 모여 연회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가는 채수 일행을 보고, “처사들은 술이나 한잔 하고 시나 한 수 지어보라”고 하였다. 채수가 즉시 시를 지어 보여주었다. 그러자 “비록 채 문장이라도 이보다 더 잘 짓지는 못할 것이다”고 감탄하였다. 그때 채수와 성현을 찾는 어사가 달려와 임금의 명을 전하니, 지방 수령들이 놀라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곳의 산맥은 보은 속리산에서 안성 칠장산까지 이어지는 한남금북정맥의 큰산(509.9m)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맥의 끝자락에 있다. 소속리산을 비롯한 여러 산들에서 발원한 물들이 삼용리 저수지로 모두 모인다. 그리고 보에서 내려온 물이 채신보 묘역과 마을을 요대를 두른 것처럼 감싸주며 초평저수지로 흘러나간다. 이와 같은 물을 풍수에서는 금성환포(金星環抱)라 하여 매우 길하게 여긴다.

보통의 혈은 낮은 곳에 있는데 이곳은 봉우리 위에 있다. 이는 주변 산이 높기 때문이다. 주변 산이 높으면 혈도 높은 곳, 주변 산이 낮으면 혈도 낮은 곳에 맺는 것이 원칙이다. 계단을 따라 채신보 묘역에 오르면 주변 산들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봉우리 정상에서 약간 내려와 묘가 있는데 사람에 비유하면 이마 정도에 해당되는 곳이다. 이를 산에 기대 혈을 맺었다 하여 빙고혈(憑高穴)이라고 한다.

이곳의 흠은 앞의 안산이 너무 높다는 점이다. 앞산이 높으면 기운에 눌려 크게 성공하기 어렵다. 이곳의 혈명을 복호형으로 본다면, 안산은 호랑이 먹이에 해당된다. 호랑이 앞에 덩치가 큰 코끼리와 같은 산이 있으니 사냥하기 어렵다. 배고픈 호랑이는 사람을 해치기 때문에 호환을 당한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 호랑이 먹이에 해당되는 개나 사슴 모양의 석물을 마을 뒷산이나 들판에 놓아 비보할 수 있다. 자연의 부족한 것을 인위적으로 보완하는 것이 풍수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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