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서점에 들러서 책 구경을 하는 것이 나의 작은 취미 중 하나이다. 요즘 출판동향을 알아보고자 하는 거창한 의도는 없고 다만 시대의 흐름을 알고 싶은 욕구는 있다. 얼마 전에도 모 일간신문사와 연결된 전시회를 보러 강남에 나간 길에 근처 서점에 들렀다. 매대를 돌아보다 눈에 띄는 책이 있어서 몇 권 샀는데 그 중 하나가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였다. 케르스틴 뤼커와 우테 댄셸 2인 공저인 이 책에서 저자들은 역사에서 사라진 여성들의 흔적을 찾아 세계사의 퍼즐을 다시 맞추고 있다. 여성들만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총명하고 용감한 모든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없다고 저자들이 못을 박고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흔히 접하는 통상적인 역사서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 의미가 있는 책이다.

여성이 세계사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여성에 관한 기억을 지우려 한 남성들의 전략에서 찾고 있는 저자들의 시각이 편향되었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책을 보면 과거에 여성을 이성적이거나 지성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본 남성중심주의적 사고가 만연했음을 알게 되는데, 저자들은 남성 못지 않은 담력과 용기를 지닌 여성, 뛰어난 지략을 갖춘 여성 군주, 학자적 소양이 남다른 여성 등을 통해 이러한 생각이 그릇된 편견임을 드러낸다.

내가 몰랐던, 그래서 더 새로웠던 사실은 반전과 반핵 등 평화운동을 여성들이 시작했다는 점이다. ‘평화를 위한 여성파업’이 미국 전역의 여성들에 대한 파업 호소 및 워싱턴 등지에서의 핵무기 실험 반대시위로 미국과 러시아의 군축 조약 체결을 가져왔고, 미군의 베트남 철수를 호소하여 전 세계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여기에 우리 한국 여성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에는 아시아의 여제들로 일본의 히미코 여왕과 중국의 무측천이 소개되고 있다. 무측천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히미코 여왕은 좀 낯선 인물인데, 전쟁에 넌더리가 난 여러 소국의 왕들이 추대해서 여왕이 되었고, 중국과 교류하며 나라를 평화롭게 잘 다스렸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 나라에는 과연 그런 여왕이 없었는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선덕여왕도 그렇고, 최근에 다시 평가되고 있는 고구려 및 백제 태동기의 소서노도 충분히 언급될 수 있는 현명한 여성 군주이다.

특히 소서노는 단재 신채호가 조선 상고사에서 ‘조선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대왕일 뿐더러,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남편을 도와 고구려를 일으켰고, 남편 사후에 혹은 그 이전에 아들들을 이끌고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했다고 하니, 우리 나라 여성사에서 결코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할 만한 인물이라 할 것이다.

한편, 무라사키 시키부라는 일본 헤이안 시대 궁정여인이 쓴 것으로 알려진 ≪겐지 이야기≫는 일본 최초의 소설인 동시에 세계 최초의 소설일 가능성도 있다고 저자들은 이야기한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더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여성 문인·화가들이 있을 테고, 여기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허난설헌이나 신사임당 같은 사람들도 이름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이웃 나라에 비해 결코 처지지 않는다고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상 인물이 거론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국력과 직결되는 문제일 수도 있겠다. 노벨상의 경우 일본은 여러 분야에서 수상자를 다수 배출했으나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을 많이들 안타까워한다. 문학상은 번역의 문제 때문에 우리 문학이 외국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아서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의견들도 있다. 그것이 부분적으로는 사실에 가깝겠지만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더 그렇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세계를 주름잡는 강국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말을 배우려 할 것이고, 그건 결국 언어차이를 뛰어넘어 우리 문학의 정수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줄 것이므로.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우리 스스로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것이 그 하나의 방안이 되지 않을까. 세계가 우리를 주목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세계가 주목하도록 만들 필요도 있다.

김향숙 경기도 행정심판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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