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졸업 이후 성민(가명)이를 다시 만난 건 10여 년 전이었다. 몹시 추운 겨울이었다. 전철에서 내려 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때 누군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돌아보니 거기, 성민이가 환한 미소로 서 있었다. 2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첫눈에 알아봤다. 녀석 특유의 천진한 미소 때문이었다.

성민이와 나는 중학교 동창이다. 정신이 조금 산만(?)했던 성민이는 내가 2학년, 3학년이 되었을 때도 여전히 1학년 아이들과 한 반이었다. 성민이에게 ‘학년’개념은 무의미했다. 그저 계속해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성민이 역시 그것이면 됐다는 눈치였다. 학년, 나이 따지지 않고 학교의 모든 이가 성민이를 좋아했고, 두루 챙겨주었다. 성민이는 딱히 교실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었다. 때로 수위아저씨들과 함께 밥을 먹었고, 종일 운동장에 서 있기도 했다. 복도에서든 운동장에서든 아는 친구를 보면, 귀가 떨어질 정도로 크게 이름을 부르곤 했다.

10여 년 전 전철역에서도 그랬다. 어찌나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던지, 순간 나도 녀석을 흉내 내고 말았다. 성큼성큼 가온 녀석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덥석 끌어안으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입으로는 연신 “내 친구 준영이, 내 친구 준영이”를 반복하면서.

전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3, 40년 전 중학교에는 ‘유급’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같이 입학한 친구가 후배가 되기도 했고, 한참 나이 많은 형이 동기가 되기도 했다. 성민이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경우였다. 딱히 유급이랄 것도 없이 그저 학교에서 지내는 친구였다. 듣기로, 성민이는 부모 없이 할머니와 살고 있었고, 그걸 아는 학교에서 ‘학년 무시, 성적 무시, 신분 무시’로 성민이를 돌봐주었다.

강릉에서 인문학을 강의하던 중 질문을 받았다. “학교란 어떤 곳입니까?” “선생님 생각에 학교는 어떤 곳이어야 합니까?” 질문을 받고 대답을 고민하던 때에, 거짓말처럼 내 친구 성민이가 떠올랐다.

학교는 다름을 인정하며 배려와 존중을 배우는 곳이어야 한다. 내 친구 성민이처럼 좀 허술한 정신을 가진 친구도 있고, 똑똑하고 잘난 친구도 함께 있어야 한다. 서로 다른 입장과 상황과 환경의 친구들이 한 데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 멀쩡한 아이들이 자사고, 과학고, 외고에 진학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패배자로 낙인찍혀서는 안 된다. 전혀 교육적이지 않은 일이다. 1등과 꼴지가 짝꿍이 되고, 선후배가 교복을 나누고, 부모의 경제력과 상관없이 같은 식판에 같은 음식을 받아서 껄껄 거리며 함께 밥을 먹어야 한다. 학교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

학교는 불편을 배우는 곳이어야 한다. 안락과 편리 대신 불편을 겪으며 고통을 참아내는 법을 익히는 곳이어야 한다. 지식과 정보를 쌓는 곳이기만 하다면, 학교의 존재의미는 없다.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머릿속에 쏙쏙 집어넣어주는 학원이 즐비하고, 스마트폰만 쥐어주면 무엇이든 찾아내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학교는 친절한 참고서나 학원교재 대신 불친절하게 편집된 교과서로 수업을 하고, 편히 쉬게 하는 대신 장시간 불편을 감수하게 하며, 별반 유용할 것 같지도 않은 태도와 마음가짐을 강요한다. 편리함과 수월함을 좇고, 말초적 욕구와 이기적 욕망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선 안 된다는 것,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기본 덕목이 무엇인지를 깨우치게 해주는 곳이어야 한다. 학교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

학교는 독서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는 곳이어야 한다. 다른 어떤 매체도 아닌 책으로 지식과 정보와 감동을 얻는 경험을 쌓게 해주어야 한다. 쉽게 얻은 건 악이며, 어렵게 얻어야 선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지식은 내 것이 아니며 써먹을 수도 없다. 오로지 책을 읽어서 알아낸 것만이 피가 되고 살이 된다. 학교는 책의 소중함을 깨우치게 해주는 곳이어야 한다. 모든 과목에서 매 학기 읽어야 할 책과 읽으면 좋을 만한 책을 선정, 함께 토론하는 것으로 과목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

끝내 전화번호도,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알려주지 않은 내 친구 성민이는 지금도 가끔 전철역에 나가서 아는 동창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나이가 같은 동창과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동창, 잘 나가는 동창과 어딘가 힘들어 보이는 동창, 그 모든 동창을 만나면 성민이는 기꺼이 자신의 품을 내어준 뒤 덩실덩실 춤을 출 것이다.

최준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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