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정동 뒷산에 위치한 김병권지사 묘의 모습이다. 비석하나 없어 찾기 힘들다. 100년전 목숨을 걸고 만세시위를 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일찍 세상을 떠난 독립지사의 묘역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안산지역사연구소

 

(22) 안산 삼일운동을 돌아보며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뒤 1912년 행정구역 개편을 통하여 안산군의 9개면 75개리를 9개면 37개리로 병합하였다. 이어 1914년 3월에는 9개 면을 시흥군 수암면, 군자면(君子面) 그리고 수원군 반월면(半月面)으로 편입시켰다.이로써 ‘안산(安山)’이란 명칭은 사라졌었다.

수암면은 옛 안산군 치소(治所)로 조선 후기 근기 남인을 중심으로 18세기 안산의 문예부흥을 추진하며 청문당을 중심으로 표암 강세황과 단원 김홍도를 길러낸 의미 있는 곳이었고 또한 1899년 주민들의 요구로 안산공립소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교육하였으나 일제강점 후 일본인 교장을 임명하며 이전의 학교 역사를 지워버렸다. 이러한 조치로 유교나 애국계몽운동의 영향 받은 향촌사회 내의 지식인 부류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또한 새로운 면제(面制) 시행으로 모든 사무의 주체를 면단위로 삼아 종래 마을에서 경영하던 사업도 면에 귀속되었고, 이장은 무급의 명예직인 구장으로 대체하고, 동리유재산도 면유재산으로 귀속되었다. 또한 식민지 무단농정, 중과세, 부역징발, 토지수탈, 소작료 인상, 고리대 수탈, 각종 농민적 권리의 부정 등은 농민들을 비참한 처지로 내몰았다. 이로써 반일의식은 더욱 고조되었고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으로 ‘독립만세’에 무한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와동체육공원에 후손들이 자비로 세운 홍순칠 지사의 비석. 사진=안산지역사연구소


지역유지의 적극적 참여

1919년 서울에서 봉기한 삼일운동은 전국 각 지방으로 퍼지며 3월 말부터 안산지역에서도 만세시위가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3월 29일 선부리 지역에서 시위가 전개된 것을 시작으로 30일 수암면 비석거리 시위, 4월 1일 반월장터 시위, 4월 4일 군자면사무소 시위 등 거사 직전에 발각된 것을 포함하여 모두 7차례에 걸쳐 모두 4천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 가운데 안산지역 시위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수암 비석거리 만세시위이다.

비석거리 만세시위 주도층은 지역 대상인, 대지주, 대한제국 장교출신 등으로 지역의 유지이며 중산층 이상의 재력가이고 연령도 4~50대 중장년층이다. 이들은 자신의 당시 위치로 보아 친일의 유혹 대상층이었고, 만세시위에 대해 침묵으로만 일관해도 자신 개인의 재산이나 지위는 그대로 지킬 수 있는 위치에서 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비석거리 만세시위가 일어나기 하루 전 각 고을의 구장에게 면사무소와 주재소, 보통학교, 향교 등이 몰려있는 읍내의 비석거리에 모이라는 통문을 돌리자 3월 30일 오전 10시 18개리 각 구장과 시위 주모자들이 인솔하여온 주민은 모두 2천여 명에 이르렀다.

윤병소(尹秉昭)는 29일 화정리(花井里)에서 이봉구(李鳳九)로부터 비석거리에서 만세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 동리 사람 3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 대열에 참여하였고, 월피리(月陂里)에서 잡화상(雜貨商)을 경영하고 있던 유익수(柳益秀)는 성포리(聲浦里) 주민 30여 명 가량이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합류하였다. 와리(瓦里)에 사는 대지주 홍순칠(洪淳七)은 통문을 받고 30여 명을 인솔하고서 수암면 남쪽까지 인솔하여 갔으며 대한제국 장교출신인 화정리의 김병권(金秉權)은 화정리 주민 30여 명을 인솔하고 비석거리로 갔다.



이날의 시위는 유익수, 홍순칠, 김병권, 윤동욱, 윤병소 등이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지휘 인솔하여 수암면 읍내에 있는 주재소·면사무소·안산보통학교 및 안산향교 앞으로 몰려가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날의 시위를 총지휘한 유익수는 18세기 안산의 청문당을 중심으로 문예부흥을 주도하였던 유경종의 후손으로 많은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는 사람이었다. 주민들이 “ 군중 속에는 난폭한 자도 있을 수 있으니 만일 폭행이나 방화 건물 파손 등을 자제하도록 좀 조정하여 달라”는 부탁을 하자 군중을 지휘하여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그러나 입구에서 순사가 “읍내로 가지 못하니 해산하라”고 하자 홍순칠은 각리(各里)의 참가인원을 점검하고 순사에게 만세를 부르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유익수에게 태극기를 주며 “읍내로 만세를 부르라”고 격려하였다. 유익수는 태극기를 휘두르며 군중을 지휘하여 주재소·면사무소·보통학교 및 안산향교 앞으로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때 유익수가 선두에 서서 읍내 쪽으로 가니 군중도 눈사태가 난 듯이 행진하므로 홍순칠도 군중을 따라서 읍내로 들어가서 만세를 불렀고 윤동욱(尹東旭)도 선두에 서서 군중의 기세를 돋구면서 시위를 하다가 보통학교 앞에서 순사 임건호(任健鎬)에게 “당신도 조선인이니 만세를 부르라”고 권하였다. 관리가 만세를 부르면 시위운동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독립운동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순사에게 “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하였으나 순사는 불응하였다.

대한제국 장교출신인 김병권(金秉權)은 군중 속에 순사의 해산명령에 불복하고 태극기를 떠받들고 선두에서 행진하는 자를 따라 이들과 같이 읍내로 행진하여 만세를 고창(高唱)하였다. 일부 군중들은 주재소와 면사무소 방화를 주장했으나 선두에 섰던 유익수가 “독립이 되면 관공서는 우리나라의 재산이 된다”는 논리로 시위대를 설득하였다. 유익수는 4월 1일 수원군 반월면 시장 시위에도 참여하여 주민 500~600명을 이끌고 같은 방법으로 비폭력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비석거리시위의 특징은 첫째, 주도인물들의 계층이다. 대부분의 지방의 만세시위는 서울 삼일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한 학생들과 천도교를 비롯한 종교 단체가 핵심 역할을 하고 이에 농민들이 가담함으로써 순식간에 전 민족운동으로 파급되었다. 그러나 비석거리 만세시위는 주도층은 지역의 유지이며 중산층 이상의 재력가 향촌사회 내의 지식인들이었다. 특히 와리(현 와동)지역의 대지주였던 홍순칠은 “나는 원래 조선독립을 희망하는 사람인데 독립을 기도하려면 많은 사람이 모여서 시위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토지 소작인들에게 참여를 독려하고 거사 당일에도 이들의 참석여부를 조사하였다. 이로보아 홍순칠은 대지주이면서도 봉건적 토지소유관계를 청산하고 토지분배라는 농민적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의식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마을 주민 간 두터운 연대감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식민지 통치의 최 말단 전달자인 동리의 구장(區長;이장)이 30~40명씩의 동리 주민을 직접 인솔하거나 통문을 돌려 주민을 모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경영을 손쉽게 하기 위하여 지방말단 행정을 면으로 일원화하는 데 그 목표를 두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전통 하에서 마을 단위 공동행동의 대표자로서 말단 실무를 관장하거나 마을의 여론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던 이장들은 새로운 식민지 행정체제에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시위를 주도할 별도의 조직 없이 각 마을로 통문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주민 간 두터운 연대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인데 만세시위가 횡적 연대 없이 마을단위로 추진된 것은 당시 주민의 결속력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셋째 2천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의 시위인 점이다. 1916년 현재 수암면의 인구는 1,592호 8,120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가운데 남자가 4,112명이었다. 남자인구 가운데 노인과 아동들을 제외한다면 2천여 명이라는 숫자는 수암면 주민이 거의 다 참석했음을 알 수 있다. 참여인원이 또한 2천여 명이라는 사실은 일본경찰 기록에 보이는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경찰 추산과 시위주도층이 주장하는 것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실제 참여인원은 이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산 삼일운동은 단발적인 시위에 그쳤으면서도 일사불란하게 진행된 시위였다. 시위의 사전준비를 위해 사용된 통문은 시위의 계획을 알리는 효과적인 전달수단이었다. 위와 같이 안산 비석거리 만세시위는 같은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 일어났던 시위와 차이를 보인다.

고려인과 함께한 삼일운동 유익수 지사 묘 참배 행사 모습. 사진=안산지역사연구소


지역의 삼일운동 정신계승

그러나 100년이 지난 오늘날 안산지역의 삼일운동 정신계승 운동은 소홀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비석거리’는 안산 최대의 만세운동 역사 현장이지만 도로 이름으로 남았던 ‘만세길’은 새로운 도로명 정비사업으로 원당골 1길로 바뀌었고, 비석거리의 상징이었던 비석마저도 미관상 보기 좋지 않다고 철거 이전하었다.

전국 곳곳에 세운 삼일운동 기념비도 안산시에는 제대로 세워진 것이 없다. 몇 년 전 안산시에서 비석을 철거 이전하고 ‘비석거리 지명 유래비’를 세우려는 것을 시민들이 건의하여 기념비로 변경하여 세웠다.

또한 100년전 목숨을 걸고 만세시위를 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일찍 세상을 떠난 독립지사 묘역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고 있다.

윤동욱지사 묘소는 현재 시흥시 산현동에 비교적 잘 단장되어있다. 그러나 부곡동에 있었던 유익수 지사 묘소는 1980년대 골프장 건설로 인근 산 중턱으로 이장 하였고, 홍순칠 지사의 묘소는 와동에 있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후손들이 마을에서 떠난 뒤에 반월 공단 개발당시 무연고 묘지로 처리되어 지금 안산시립 공동묘지에 합장되었다. 묘지를 찾지 못한 후손들은 2005년 자비로 와동체육공원에 기념비를 세웠다. 김병권 지사의 묘는 지금 화정동에 있으나 묘비도 없어 마을 분들의 안내 없이는 찾아갈 수 없는 실정이다.

이렇게 독립운동가들의 묘소가 홀대받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2019년에는 나라와 안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기득권을 모두 던져 버리고 몸소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던 안산의 독립지사들 묘소 앞에 우리 모두 편한 마음으로 참배할 수 있는 해가 되었으면 한다.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장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