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8년(고려 현종 9) 가을, 개성 송악산 중턱에 있는 연경궁(延慶宮) 건덕전(乾德殿) 옥좌에 앉은 현종은 특별 하교를 반포했다. 개성부를 혁파하고 왕도(王都)의 외곽 지역을 ‘경기(京畿)’로 명명하라는 것이었다. 앞서 고려 성종은 995년에 개경 주변에 6개의 적현(赤縣)과 7개의 기현(畿縣)을 설치했는데, 현종이 이들 적현·기현을 한데 묶어서 정식으로 경기라 부르라고 하면서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경기 제도가 생겨나게 됐다. 원래 ‘京’은 ‘천자(天子)가 정한 수도(京師)’를 뜻하고, ‘畿’는 ‘천자의 거주지인 왕성(王城)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 이내의 땅’을 의미했으나 점차 경기는 ‘왕도의 외곽지역’이라는 일반적 개념으로 쓰였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서 경기의 의미와 정체성은 무엇일까? 5천 년 역사에서 경기 지역은 삼국 통일의 기반이 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점령한 이후 대당 무역기지로서 강화의 혈구진(穴口鎭)과 남양의 당성진(唐城鎭)을 이용했다. 이와 같은 무역로를 통해 신라는 중국의 선진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이는 한반도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고려 시대 역시 예성강의 벽란도를 중심으로 하는 개성 일대의 무역 전진기지는 전 세계의 중요한 국가들이 교역했던 곳으로, 유럽의 해상 도시들에 버금가는 지역으로 성장했다. 이처럼 경기 지역은 바다와 강으로 연결 돼 서울과 함께 하는 지리적 측면과 고유의 정치적 문화적 특성이 어우러져 실용성과 개방성이 다른 그 어떤 지역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경기 지역은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항쟁의 터전이기도 했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을 막아낸 처인성과 죽주산성은 경기의 땅이었고,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던 행주산성 역시 경기의 땅이었다. 경기 백성들의 자주적 항전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고려의 건국 주체는 단연코 경기 지역 출신이다. 서해와 예성강을 아우르며 송도를 기반을 하는 해상세력 왕건과 연천과 철원을 기반을 하는 농림 세력 궁예의 대결은 왕건의 승리로 마감되면서 새로운 국가 고려가 건국됐기 때문이다. 조선의 건국 역시 경기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신진사대부들과 무장 출신의 이성계가 결합하면서 무능과 부패로 얼룩진 구 왕조를 물리치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었다. 이로 볼 때 경기 지역은 우리 역사에서 건국의 중심축이며 어느 누구도 이를 부인할 수 없다. 더구나 고려시대 이래 수도를 둘러싼 경기 지역은 국토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한강·임진강 등의 수로 교통이 발달해 지리적으로 경제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경제적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 속에서 경기라는 말이 처음 쓰여 졌을 때부터 현재까지 돌아봤을 때 경기도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본다면 그것은 바로 국가 전체의 개혁을 주도하면 민산(民産)을 풍부하게 하고, 실학(實學)을 기반으로 열려 있는 사고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는 개방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개혁정신과 열린 사고는 다른 지역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은 경기 지역만의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인구 1천300만 명의 경기도는 인구수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분야의 지표에서 다른 광역단체를 압도하며 대한민국의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특히 최근 남북한이 비무장 지대 GP 철거, 단절된 경원선 복원 논의, 남과 북에 반반씩 걸쳐진 궁예 도성 발굴 등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경기도가 남북통일을 초석을 다지는 핵심 장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는 올해로 경기정명(京畿定名) 천년을 기념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중에서 눈여겨 볼 만한 것이 오는 19일부터 21일까지 경기상상캠퍼스(옛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에서 마련되는 ‘경기천년 대축제’다. 이번 행사에서는 지나온 천 년의 전통문화와 지금의 생활문화를 비교하고 시민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인다고 하니 자못 기대가 된다. 조상들이 물려준 경기 천 년의 역사를 어떻게 계승하고 발전 시킬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그래야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천 년 또한 경기도가 대한민국 중심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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