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선생은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조선시대 최대의 개혁가이자 실학자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남양주가 배출한 인물로서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주장한 역사적 위인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당대 조선이 직면한 시대상황과 위기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그에 대한 올바른 해결방안을 적시할 수 있었기에 조선시대와 현대를 아우르며 국가대표급 실학자로 존경받고 있다.

다산 정약용에겐 견디기 힘들법한 위기와 절망의 18년 유배생활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5년 동안은 강진의 동문 밖 주막을 기거했고, 그 뒤 고성암 보은산방과 제자 이학래의 집 등에서 3년을 보냈다.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건 유배 후 8년이 지나서 부터인데 좌절과 고통의 귀향살이에서 조선시대 대학자인 정약용선생은 정치적 탄압의 시간을 학문을 하라는 천명으로 여기고 열정적 집필로 알찬 결실을 맺는다.

다산학의 근간을 이루는 경세학과 경학에 대한 집중적인 학문연구가 이루어졌으며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여 권의 방대한 저작물들이 다산 정약용의 노력에 땀을 더해 성실의 열매로 후대에 존경받는 역사적 결과물로 나타났다. 또한 유배지에서도 제자들을 모아 교육하였으며, 제자들도 함께 저술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유배지의 제자들로는 이강회·이기로·이청·황상·정수칠·윤종문 등을 들 수 있다.

다산의 역사적 저술인 목민심서는 지방관리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지방행정을 혁신하기 위해 지방관리의 임기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모든기간을 통해 반드시 준수하고 실천에 옮겨야 할 실무상 문제들을 각 조항으로 설정하고 자신의 견식과 진보적 견해를 피력해 놓았으며 국가의 전반적인 개혁안을 담은 경세유표에는 조선의 시대상황에 적합한 중앙의 관제·세제·각종행정기구 등 국가체제를 운영하는 제도와 법규에 대하여 먼저 개혁방안을 제시한 후 제도의 모순, 실제사례, 개혁의 당위성 등을 논리적체계를 갖추어 실증적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기술 발전과 상공업 위주로한 부국강병 등 실학자들의 연구 성과도 깊이있게 다뤄졌기에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정치적 사회적 이념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죄수에 대하여 신중히 심의(審議)하는 흠휼(欽恤)사상에 입각하여 재판하라는 흠흠신서 등 다산의 저술에는 당시대의 불공정으로 인한 부패와 타락을 막을 수 있는 혁신적 개혁안이 담겨 있는데 바로 다산의 실학사상이다. 그가 현시대에도 흠모와 존경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시대에도 존경받는 다산 정약용선생을 좀 더 친근하게 알리고 싶은 내고장 남양주에서는 “정약용 선생의 해배 및 목민심서 저술 200주년”을 맞이한 2018년을 다산 정약용의 해로 선포하고 올해초 다산 정약용 선생의 청렴가치를 확산하고자 전국 공직자를 대상으로 청렴목민학당을 운영했으며

“지속가능한 발전, 정약용에게 묻다!”라는 슬로건을 걸고 국·내외 연사를 초청하여 정약용 선생의 경제관, 인간관, 교육관, 과학사상과 관련하여 남양주시·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공동으로 국제심포지엄도 개최했다.

이외에 문화유적투어 ‘정약용을 찾아 떠나는 실학여행’, 다산 가족캠프, 인문지식콘서트 ‘정약용의 그날’, 초등생을 대상으로 한 여유당예문학교 ‘정약용에게 공부비법을 묻다!’, 제32회 남양주 다산문화제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를 펼쳐왔으며

특히 공중파를 통해 ‘정약용, 200년의 꿈’이란 주제로 당대 최고의 학자 정약용의 삶의 궤적을 그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조명하고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보는이로 하여금 다산 정약용의 삶과 사상을 좀 더 가깝게 이해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했다.

필자는 다산선생의 생각과 이념이 널리 전파돼 현대에 해결하지 못한 문제점이나 불공정 한 일들이 다산사상인 위민, 애민, 청렴정신과 실학사상으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하여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는 초석으로 삼아지기를 소망해본다. 2018년 다산을 생각하며...

김용성 경기도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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