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부터가 언제나 집안의 평안을 위하여 말을 참아왔다.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주말은 그분들과 함께 보낸다. 더 이상은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어머니는 이제 요양병원으로 가셨지만, 일요일에는 어김없이 시아버지와 함께 외식을 한다.

추석부터 시월은 제사도 많다. 2주 걸러 한 번씩 시할머니 시할아버지 제사에 이번 주말에는 시제도 지내러 가야 한다. 일을 하면서도 꾸역꾸역 집안 대소사를 챙겨 온 이유는 단 한 가지, 家和萬事成이란 명분 때문.

서른이 된 아들이 연애를 시작했다. 며느리 감을 생각하면 제사만큼은 내 대에서 끝을 내야 한다는 생각뿐이나 시가 쪽 동의를 얻는 일은 아직이다. 전통으로 남겨야 할지 구습이라 타파하는 것이 옳을지 나도 고민이다.

그러나 만일 가정폭력이 있었다면? 이 모든 일은 지속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삼십 년 된 우리 부부라고 왜 다툼이 없었겠는가? 다만 신체적인 폭행은 삼갔던 나름의 지혜가 혼인관계를 여기까지로 끌고 온 셈이다.

요즘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가정폭력이라는 것을 더 이상은 ‘칼로 물베기’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가정폭력특례법에는 가정폭력을 가정보호사건이라고 간주하여 여러 각도에서 가정이 유지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다년간의 혼인경험을 토대로 볼 때 일단 폭행이 반복되는 상황이라면 결코 가정이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주부로서 수많은 책임을 떠맡음에 있어 나만해도 조그마한 폭력피해라도 존재했었다면 혼인관계의 유지는 어려웠을 것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사법제도로서 가정을 유지시키겠다는 생각 자체가 너무나 관료적이고 강압적이라 느껴진다. 특히 폭력이 반복되는 가정을 가정보호라는 명분으로 묶어두는 일만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되겠다. 형식적으로 가정이 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욱이 폭행이 난무한 상황이라면 둘 중 한 사람은 적어도 위험에 처한 상황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피해자를 가정이라는 테두리로 묶어두려 한다면 결국에서 가서는 인명피해도 발생할 수 있다.

문제는 가정폭력 행위자의 선택이다. 가정폭력특례법에는 가정유지의 결정권이 모두 피해자에게 있는 것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상 가정유지의 결정권은 가해자에게 있다. 폭력적인 습벽을 고칠 것인가 배우자와 아이들의 권익을 나의 권익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인정을 해 줄 것인가, 이 모든 사안이 가해자의 손에 달려있다. 이 같은 결정권에 대한 심사를 거치지 않은 채, 가정 유지의 의사를 모두 피해자에게만 물어보는 제도는 중단되어야 한다. 만일 폭력적인 습벽을 중단할 수 없다면 당연히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법적 강제력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너무 당영한 이야기이지만 가정의 유지보다 피해자의 생명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제를 앞두고 잠시 다시금 생각을 하고보니, 폭력적인 언사조차도 모두 고친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이수정 경기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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