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7년(세종 9) 6월 10일, 제주도 찰방(察訪·역참을 관리하던 관직) 김위민이 국왕 세종에게 제주의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해 장계를 올렸다. 그중 하나가 바로 감귤 농사에 대한 것이었다. 김위민이 제주로 발령받아 현지에 가 보니 감귤 농사가 가장 문제점이 컸다. 조선 건국 후부터 제주에 있는 관리들이 귀한 감귤 나무를 특산물로 지정해 조정에 세금을 바치게 했는데, 문제는 감귤나무 일부가 아니라 나무에서 나오는 과실 전체에 대해 세금을 매긴 것이다. 이는 실제로 감귤 전체를 국가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일부 관리들이 중간에서 빼먹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제주 관리들은 감귤 나무를 센 뒤 장부에 기록하고, 열매가 맺힐 만하면 정확한 수 까지 기록해 봉해 놓았다가 감귤이 익으면 모조리 관으로 가져갔다. 행여나 해당 나무의 주인이 개인적으로 열매를 따는 일이 있으면 절도죄로 몰아 처벌했다. 백성들은 감귤나무를 재배해봐야 단 한 푼의 이익도 남지 않고 오로지 고통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더 이상 감귤 농사를 짓지 않으려고 했다. 이러한 현실을 눈앞에서 본 김위민은 감귤 농사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해마다 감귤나무를 심게 장려하고, 현물로 세금으로 걷는 대신 조정에서 감귤 구입비를 내고 진상하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에 세종은 그의 말이 옳다고 판단, 감귤을 강제로 진상하는 것을 금지하고 돈을 내고 구입 하라 지시했다.
하지만 관리들은 왕의 명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세종의 아들 세조 역시 제주도의 감귤 농사의 폐단을 알고 있었고, 그가 직접 말했듯 감귤은 종묘의 제례에도 올리고 빈객(賓客)을 대접하는 귀한 과일이었기에 아버지의 명을 이어 관리들이 감귤농장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감귤을 착취하는 폐단은 계속 이어졌으며, 성종 대에도 악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성종은 즉위 20년 되는 해인 1489년 2월에 감귤 나무를 심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면제해주고 후하게 상을 주도록 했다. 그리고 성종 이후 국왕들은 제주의 감귤을 전라도 해안지방에도 심게 한 뒤 감귤 재배에 정성을 쏟았다.
성종의 특별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폐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국왕의 지시가 실제 제주의 현장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제주의 관리들은 감귤 농사 폐단을 개혁하라는 국왕의 지시를 은폐했으며, 여전히 감귤 나무와 감귤의 숫자를 세고, 한 개라도 없어지면 이를 보충하게 했다. 농사를 짓다 행여나 감귤이 바람에 날아가기라도 하면 제주의 아전들은 용서치 않았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고통을 받던 제주 백성들은 감귤 나무에 구멍을 뚫고 호초(胡椒)를 넣어 나무가 자연스레 죽게 만든 것처럼 위장했다. 이렇게 하면 감귤나무가 제주 관아의 세금 대상 목록에서 빠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의 백성들이 자식 같은 귀한 감귤나무를 어쩔 수 없이 죽게 만드는 상황까지 가게 된 것이다. 감귤의 희소성과 인간의 탐욕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처럼 조선 시대의 귀한 감귤이 이제는 엄청나게 생산돼 온 국민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과일이 됐다. 하지만 따뜻한 곳에서 재배되는 특성 탓에 북한 주민들에게는 여전히 구하기 쉽지 않은 과일이다. 그래서 제주도와 남북협력 제주도민운동본부는 지난 1999년부터 제주의 감귤을 북한에 선물로 보냈다. 제주의 감귤을 선물 받은 북한은 이를 무척이나 고마워했고, 이로 인해 남북 경색 시에도 제주도와의 관계는 꾸준히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남북관계가 악화 돼 감귤 선물을 하지 못하다가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에서 보낸 자연산 송이에 대한 답례 차원으로 군 수송기를 이용, 제주 감귤 200톤을 북한으로 보낸 것이다. 일부 극우론자들은 문 대통령이 북측에 감귤만 보낸 것이 아니라 감귤 상자에 돈까지 보냈을 것이라는 뉘앙스로 비판했다가 역풍을 맞기도 했다. 남북화해의 마중물이 될 감귤에 대해 지나치게 색깔론으로 응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감귤 전달로 인해 남북 정상이 백두산에 이어 한라산에 올라가게 된다면 아마도 남북통일은 한걸음 앞당겨 질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이번 사안이 단순한 이벤트로 그치지 말고 실제적인 통일 교류로 이어지길 진심으로 기대한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