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면에서 만세운동이 감돌다

시흥시는 전근대 인천과 안산의 일부가 합쳐진 지역이다. 일제의 강점 이후 1914년 군·면통폐합으로 시흥군이 만들어지고 서남부 지역에 군자면(君子面, 현재 시흥시와 안산시의 일부가 합쳐진 지역)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군자면 중심에는 조선 후기 안산군 최초의 장시 석곡산대장(石谷山垈場, 현재 서안산나들목 부근)이 위치하였다. ‘안산군읍지(安山郡邑誌, 1871년)’에 따르면 “대월면에 산대장시가 있으며, 읍으로부터 서남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다. 벽처(僻處, 외따로 떨어져 있는 매우 후미지고 으슥한 곳)에 있어 달리 유통되는 물화는 없고 단지 토산물만 교역되다가 한낮에 파시가 된다. 가히 바닷가 구석진 곳의 순박한 풍속을 볼 수 있다.”라고 쓰일 정도로 군자지역은 벽처였다.

이곳에서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이 독립을 위해 떨쳐 일어날 때,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군자면이 속한 시흥군은 3월 7일 영등포에서 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시위 후 동맹휴학을 결의한 이래 본격적으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특히 수암면(秀巖面) 비석거리에서 3월 30일 시흥지역 최대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윤동욱(尹東旭) 윤병소(尹秉昭)와 홍순칠(洪淳七), 유익수(柳益秀), 김병권(金秉權), 이봉문(李奉文) 등의 주도로 2000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 수암 경찰관 주재소와 수암면사무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앞서 군자면에서도 3월 29일 장곡리(長谷里)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어 3월 31일 선부리(仙府里)에서도 다수의 주민들이 거모리(去毛里)의 군자면사무소(현재 군자초등학교 후문 부근)와 거모 경찰관 주재소(현재 군자파출소)로 몰려가 만세시위를 벌였다.

4월 3일에는 “거모 경찰관 주재소 및 군자면사무소를 불질러 부숴버리자”라는 격문이 각 동리에 배포되었다. 격문에서 이 두 기관에 대한 공격을 분명히 한 것은 이들 기관이 일제의 무단통치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첩지(貼紙)가 하루 전에 일본 경찰에게 발견되어 영등포로부터 순사 6명과 헌병 7명이 무장하고 이를 막기 위하여 파견되어 있었다.

당시 군자면민 다수는 농민이지만 60% 이상의 농민이 자신의 토지를 가지지 못한 채 서울 등지에 사는 지주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인이었다. 봉건잔재인 지주소작제가 식민지 지 주재로 강화되어 대다수의 농민들의 처지가 매우 빈곤하였다. 더욱이 군자면은 해안가를 중심으로 간사지 개간과 전통염업인 전오염(煎熬鹽)이 활발하였다. 이러한 지역민에게 일제는 각종 부역에 동원하는 것은 물론 조선 소금에 대해서 가혹한 세금을 물리면서 지역민들을 더욱 힘들게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가혹한 통치는 주민들로 하여금 ‘만세운동’에 대한 열망을 부추겼다.

 


4월 4일 군자면 주민들이 떨쳐 일어나다

4월 4일 오전 11시경 거모 경찰관 주재소 부근에 약 1천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원곡리(元谷里) 강은식(姜殷植, 35세)은 주민들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받은 태극기를 휘두르며, 주민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격렬한 기세로 주민들이 달려들자 일본 경찰이 총을 쏘아 해산시키려 하였다.

같은 날 죽율리(竹栗里)에서는 이 마을에 사는 김천복(金千福, 23세)이 주민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면사무소로 가라. 만약 불응하는 때에는 후환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주민 수 십 명을 구(리)장 집에 모이게 하였다. 김천복은 주민들을 이끌고 거모리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에 일본 경찰의 총소리를 듣고 주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김천복은 다른 주동자 2~3명과 함께 길을 돌아서 거모리로 갔다. 거모 경찰관 주재소 부근에 이르러 그곳에 모인 수백 명의 주민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구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모의하다

4월 6일 장현리(長峴里) 서당생도 권희(權憘, 20세)는 대표로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받은 10년간의 학정에서 벗어나 독립하려 한다. 우리들은 이 기쁨에 대하여 내일 7일 이 마을 구(舊) 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려고 한다. 각 주민은 구 한국 국기(태극기) 1기를 휴대하여 모이라”는 ‘비밀통고(秘密通告)’인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였다.

거사 장소인 구 시장은 구장터로 석곡산대장이다. 특히 이곳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인해 1896년 2월 안산군민들이 봉기하여 정부의 친일적 행태를 성토하는 대규모의 민중 집회가 이루어졌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권희는 작성한 비밀 통고문을 각 동리에서 차례로 회람하도록 그림으로 표시하고 장곡리(長谷里)에 사는 친구 장수산(張壽山, 순한, 20세)에게 마을 구장의 조카 이종영(李鍾榮)의 집 앞에 놓아두어 주민들이 서로 돌려보게 하였다. 이종진(李鐘振)과 이응수(李應洙)도 비밀 통고문을 장곡리 구장 이덕증(李德增)에게 전달하였고, 이덕증은 사환을 시켜 월곶리(月串里) 구장에게 보냈다. 그러나 구장터 만세운동 모의는 사전에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주모자인 권희, 장수산 등이 체포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3.1운동 이후 권희는 가세가 기울어 소작농이 되었다. 지역의 여민동락(與民同樂) 소작인회 대표를 맡아 경성 지주 낭정호(浪定鎬, 유풍상회(裕豊商會) 사장)에게 소작료 고정세율을 받아내 10년간 변동이 없도록 하는 등, 소작인들의 생존권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낭정호의 선의에 대한 보답으로 ‘낭정호 송덕비(영모재 공원)’ 건립에 앞장섰다. 장수산은 지역의 한시 동호회인 ‘연성음사(蓮城吟社)’에서 개최한 1927년 한시공모(동아일보 광고, 9월21일)에 입상하였다. 해방이후에는 군자국민학교 오이도간이학교(1952년, 금호간이학교, 거모동 566)를 이전하고 장곡초등학교 설립에도 앞장섰다.

1989년 시흥시 승격 이후 군자 지역에서는 군자면의 3.1운동을 기려 1995년 8월 15일 옛 군자면사무소 부근인 군자초등학교 후문에 ‘독립운동유적지’비를 세웠다.

‘독립운동유적지’비는 군자초등학교에 위치해 있으며 비문은 “1919년 4월 4일 군자면 주민 수백 명이 이곳에 집결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동한 후 군자면사무소와 군자 경찰관 주재소에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시위행진을 하면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라고 기록 되어있다.

2011년 시흥문화원은 비석거리 만세운동의 주도자인 윤동욱을 ‘시흥의 인물’로 선정하고 시민모금을 통해서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곳에서 시흥시는 2012년 3.1절 기념식을 처음 열었다. 이후 군자초등학교로 옮겨서 기념식은 물론, 참가자들과 함께 군자면 3.1운동을 되새기는 ‘3.1정신 계승 거리걷기’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2016년에는 군자동 3.1절 기념비 건립추진 위원회의 주도로 시흥시에서 ‘시흥시 삼일독립운동 기념비’를 세워 시흥지역의 3.1운동을 기리고 있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 안산시흥지부가 나서서 시흥문화원 등 지역의 여러 단체들과 협력하여 시흥시의 3.1운동 관련 애국지사를 기리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시흥시(문화예술과)는 ‘관내 독립지사 기념비 건립 계획’을 수립하고, 첫 번째로 2018년 7월 17일에 ‘독립지사 김천복 기념비’를 세웠다. 앞으로 3.1운동으로 정부로부터 공훈을 받은 시흥시의 애국지사인 권희, 윤동욱, 윤병소, 장수산의 기념비를 차례로 건립해 나갈 예정이다.

독립지사 김천복 기념비는 생금어린이공원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은 대나무와 밤나무가 많았다고 전해지는 대암(죽율)마을로 김천복의 고향이다. 향토유적 7호인 ‘생금집’ 전설이 깃든 곳이다.

내년이면 3.1운동이 100주년 되는 해다. 지금까지 시흥시에서는 애국지사들의 업적을 기념하는 사업이 주로 이루어졌고, 시흥지역의 3.1운동에 대한 연구는 매우 부족하다. 특히 3.1운동과 유적에 대한 기초 연구는 물론, 애국지사와 후손들, 3.1운동이 지역에 끼친 영향 등 실질적인 연구가 부족한 실정이다. 앞으로는 기념사업뿐만 아니라 시흥지역 3.1운동에 대한 전반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물을 바탕으로 자라나는 청소년과 일반시민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도 만들 수 있도록 힘을 모와야 할 것이다.

이병권 시흥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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