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유치원 비리·삼성바이오 분식회계로 국감스타 등극…"훗날 세상 바꾼 사람 기억되고 파"

득(得)보다는 실(失)이 많을 거라 생각했다. 밑져야 본전이면 다행이었다. ‘마이너스’가 될 판에 뛰어든 심정이었다. 온 국민과 언론이 주목을 하더라도 ‘잠깐’일 거라 생각했다. 늘 그렇듯 ‘반짝’하고 사라지면 다행이라 여겼다.주변의 우려나 만류가 없던 것은 아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자가 견뎌야 할 무게는 적지 않았다. 매년 열리는 국정감사에서 그는 매년 모두가 눈감았던 카드를 꺼냈다. 바로 어제 오늘 일이 아닌 ‘비리 사립유치원’이란 카드였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정치의 무게는 세상의 변화만큼의 무게”라면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의 가치와도 같다. 무게가 점점 더 커져가는 기분”이라며 옅게 미소지었다.

#한 달간 인터뷰만 100여회… 유일한 낙 ‘아침 운동’도 두달째 포기 =매년 국정감사를 통해 이슈를 만들어낸 국회의원을 두고 ‘국감스타’, ‘국감인물’이라고 표현한다. 2018년 올해의 국감스타, 국감인물로 박용진 의원을 빼놓을 수 없다. ‘비리 사립유치원’으로 국감장에 큰 소용돌이를 일으킨 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로 연타를 날렸다.

박 의원은 인터뷰 직전에 일정을 마친 뒤 부랴부랴 의원실로 들어섰다. 옷 매무새를 다듬을 시간도 없었다. “3분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당일 오전 라디오 인터뷰가 있었고, 방송 인터뷰 일정도 소화했다. 마침 이날 ‘유치원·어린이집 공공성 강화 특별위원회’가 구성됐고, 이후에는 한 노동조합 사무실도 방문했다. 점심 직후인 오후 2시 30분 방송 일정이 있었다. 박 의원은 “예전에는 박용진의 주장, 멘트 정도만 주목 받았다면 이제는 박용진의 정치, 인생까지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면서 “지난 한 달간 인터뷰와 방송출연 등 관련 일정만 100회가 넘었다. 체력적으로 힘든 게 사실”이라고 했다. 매일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반복한다. 쉬는 시간 없이 일정이 이어진다. 그는 “정치도 결국엔 사람을 대하는 일”이라고 했다. 박 의원은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라면서도 “아침 일정이 많아지면서 매일 오전 6~8시 매일 운동하던 시간이 없어졌다. 유일한 낙이었는데 두달째 그렇게 살고 있다”고 전했다.

#‘불편한 진실’을 건드린 자의 무게와 책임 =그가 비리 사립유치원을 향해 칼을 빼든 순간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그가 겪어야 할 시간과 과정은 생각만큼 험난했고, 그가 감당해야 할 무게 역시 적지 않았다. 그는 ‘불편한 진실’이라고 표현했다. 박 의원은 “비리 사립유치원이 있다는 사실을 다들 아는데, 진실을 다 아는데도 쉬쉬하고 말았던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불편한 진실’의 고리를 쥐고 있는 존재는 ‘기득권층’이라고 했다. 그는 “‘말해봐야 안 될 거야’, ‘나만 손해볼 거야’라는 생각에는 두려움과 공포가 집약돼 있다”면서 “불편한 진실을 건드리는 사람은 용감하거나 또라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당일 오전에는 사립유치원 관련, 오후에는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사건 관련해서 각각 방송 일정이 잡혀있었다. 박 의원은 “정무위에 있을 때 삼성이라는 거대 재벌의 반칙, 특권 등 부당한 기업지배를 문제 삼기도 했었다”면서 “비리 사립유치원 이후 삼성바이오 사건을 가지고 나온 것도 (부당함을 지적하는) 비슷한 맥락”이라고 했다.

그의 삶 속에서 사립유치원과의 연결고리가 있던 건 아니었는지 궁금했다. 그는 “그런 건 없다. 비리 사립유치원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라며 “유치원을 보내는 부모들도 알고, 언론에 이미 여러 차례 나왔던 말그대로 ‘사실’”이라고 말했다. 박 의원은 “제가 한 일은 개별 사립유치원들의 사실들을 다 더해서 통계를 내 그 ‘날 것’을 보여준 것 뿐이다. 더해서 전체를 살펴보니 기가막히더라”며 “이 지경이 되도록 ‘교육당국은 뭘 했냐’부터 시작해 '정치인들은 뭘 했냐’로 이어져 빵빵 터지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의원실에서는 ‘마이너스 리스트’까지 만들었다 =‘불편한 진실’을 쫓는 자의 심정은 어땠을까. 더구나 ‘거대 표심’의 목덜미를 잡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박 의원은 “정치인들이 건들지 말아야 하는 부분, 금기시하는 부분은 ‘표를 쥐고 있는 집단’”이라고 했다. 그는 결국 이 모든 과정이 끝나고 박용진 ‘혼자’ 남게 되는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초선 의원’이기에, ‘진보정당 출신’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도 평가한다. 이에 대해 박 의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면서 “올해 국정감사에서 밟아온 과정들은 국회의원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초선의원이기에 진보정당 출신이기에 결심할 수 있었던 부분도 분명 있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흩어져 있던 개별 사례(사실)들을 통계내는 게 어렵나. 엑셀에 숫자만 적어 넣으면 한 번에 된다”며 “저 혼자 한 것도 아니다. 보좌관들과 함께 모여 클릭, 클릭으로 다 더했을 뿐”이라며 컴퓨터 마우스를 움직이는 흉내를 냈다.

이같은 파장을 예상은 했을까. 그는 “정반대였다”고 했다. 의원실 내부에서는 올해 국감을 준비하며 ‘마이너스 리스트’를 만들었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언론이 주목해도 잠깐이면 끝나고 말 줄 알았다. 박 의원은 “마이너스를 예상한 상황에서 지난 10월 5일 1차 토론회를 준비했다. 이후 언론에서 보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국감이 시작되면서 민낯을 보여줬다”며 “교육당국을 지적하고, 더 나아가 교육부 장관을 거꾸로 매달고, 여야(與野) 가릴 것 없이 앞으로 나아가자는 생각 뿐이었다”고 회상했다.

#우려와 만류에는 ‘감사하다’… 국회의원은 나약한 존재 = 주변의 우려나 만류가 없던 것은 아니다. 동료 의원들은 물론이고 당 내에서도 박 의원을 걱정했다. 그는 “감사하다”는 말들로 주변의 우려나 만류, 걱정을 받아들였다. 박 의원은 “국회의원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국민들은 미처 상상하지 못하실 것”이라며 “누군가가 ‘내가 동네에서 표를 100표쯤 가지고 있거든?’이라는 사람이 나오면 앓는 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필요하다면 ‘죽는 시늉’까지도 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가 국회의원이라고 했다. 그는 “선거에 나갔는데 100표 때문에 떨어졌다고 생각해봐라. 아까워서 어떡하냐”면서 “국회의원에게 (거대 표심은) 그런 존재”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험난한 길을 걷게 된 데에는 그의 과거 경험이 큰 몫을 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차명계좌를 쫓다가 제도개선까지 갔다. 2008년 이건희 회장은 이른바 ‘삼성특검’이 자신의 차명계좌 1천여개를 발견하자 “실명 전환하겠다”고 했지만 10년이 지나고도 변함은 없었다. 지난해 10월 박 의원이 ‘차명계좌 인출 의혹’을 제기하면서 이 사안의 민낯이 드러났다. 박 의원의 ‘2008년 조준웅 특검시 확인된 은행별 차명계좌 및 실명전환 현황’ 자료를 통해 차명계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4조4천억여 원을 차명계좌 해지 및 인출을 통해 찾아간 사실이 확인됐다.

박 의원은 “25년간 우리나라 금융당국이 금융실명제를 엉터리로 운영하고 있었다”면서 “이를 바로 잡아서 법 적용을 달리 하니 무려 올해 1~6월 6개월간 1천93억 원의 세금이 거둬졌다”고 했다. 그는 “국회 1년 운영에 약 1천억 원이 든다고 하더라”며 “딱 그만큼의 세금이 들어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엉터리로 운영되고 제대로 적용되지 않던 것을 ‘딱 하나’ 바꾸니 이런 변화가 이뤄졌다고 했다. 그는 “이번 국감을 통해 ‘사립유치원에 대한 감사를 해라’, ‘감사 결과를 공개해라’, ‘투명한 회계시스템을 보장해라’ 주장하고 있는데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며 “그런데 봐라. 딱 이거 하나 바꾸려고 하니 이 난리가 났다”고 말했다.

#‘세상을 바꾼 박용진’으로 기억되고 싶다 = 박 의원의 이같은 행보에 제동을 건 자유한국당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 12일 한국당이 교육위 법안심사소위에서 ‘한국당안과 박용진3법을 묶어 병합 심사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 의원은 “제발 상식으로 복귀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이야기는 들었어도 발의도 되지 않은 안을 병합 심사하라는 건 처음 들었다”며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정치의 무게’에 대해 ‘세상 변화만큼의 무게’라고 표현했다. 가장 보람되게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즐겁고 행복하다고 했다. 그는 민주노동당 창당 당시 스물아홉이었다. 당을 만들었으니 출마를 하게 됐고, 그게 첫 도전이었다. 박 의원은 8년 뒤 진보신당으로, 이후 8년 뒤에는 민주당으로 도전하며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스물아홉의 ‘청년 박용진’은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박 의원은 “18년 전 그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없었다. 재벌들이 나라를 주물럭거리지 않는 세상,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 대접받는 세상을 꿈꿨다”고 떠올렸다.

닮고 싶은 사람으로는 ‘정도전’을 꼽았다. 박 의원은 “정도전은 혁명으로만 끝나지 않았다”며 “체게바라처럼 쿠바혁명을 성공시키고 총 들고 다른 데로 간 게 아니라, 만들고 싶은 세상을 설계하고 직접 그 세상을 살아보기도 한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시대 정치인 ‘김육’도 닮고 싶은 인물로 지목했다. 대동법을 만들어 조선시대의 경제민주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그는 “김육은 대동법 하나로 조선시대 후기 경제 틀을 바꿨다. 우리시대에도 경제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김육이 떠오른다”고 했다.

훗날 그는 ‘세상을 바꾼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스물아홉 청년 박용진의 모습이 담긴 선거용 포스터가 의원실 한쪽 벽에 붙여져 있었다. 그리고 포스터를 쳐다보다 마주앉아 있는 지금의 박용진을 바라봤다. 박 의원은 “제가 감히 삼성전자 회장을, 사립유치원을 어떻게 건들 수 있었겠나. 정보접근이 가능한, ‘정치면허증’이란 걸 지닌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며 “목이 갈라지고 힘들어도 감사히 생각하며 열심히 일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박 의원은 “우리 아이들이 살 미래의 가치만큼의 무게를 얹고 있다. 감개무량하다”면서 “세상을 바꾼 사람 박용진으로 기억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앞으로 제가 감당해야 할 무게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전했다.

취재=오정인기자/jioh@joongboo.com

사진=노민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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