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고 노란 단풍잎이 비처럼 바람에 몸을 날리던 어느 날, 가을을 온몸으로 맞은 듯 정취 가득한 숲속의 한 음식점에서 T를 만났다. T는 베트남에서 온 여성결혼이민자이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쉴 새 없이 그 큰 눈방울로 먼 곳을 응시하는 그녀가 몹시 외로워 보였다. 나는 우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우렸다. 그녀의 남편은 야간에 근무하는 직업이라 그녀는 늘 혼자서 잔다.

이국의 밤은 어설프고 두렵기만 하여 밤새 뒤척이다가 날이 밝아 와야 겨우 잠이 들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남편이 아침에 귀가하여 벨을 누르는데도 문을 열어 주지 못했다. 새벽에야 잠이 들었던 그녀가 속으로 잠근 문을 열어 주지 못해서 놀란 그녀의 남편이 몇 시간을 발을 구르며 기다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신혼인 그들이 같이 있어도 서로 그리울 텐데 매일 밤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야하는 것은 상상이상의 애달픔일 수도 있다. 그럴 때면 유달리 커피를 좋아하는 그녀는 특히 고향의 커피가 생각난다고 한다.

베트남의 진하고 쌉싸래한 블랙커피 ‘카페 덴’이 그리운 날이면 동네가게에서 진한 커피를 사들고 여기저기를 다니며 마신다고 했다. 달콤한 아이스 연유커피 ‘카페 쓰어다’도 좋지만 왠지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배회할 때면 ‘카페 덴’ 이 당긴다는 것이다.

어느 날은 밤새 일을 하고 돌아 온 그녀의 남편이 잠들자 집을 나와 24시 편의점에서 커피와 빵을 사서 편의점 밖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먹고 마시며 하염없이 고향생각에 빠져 있다 보니 자고 일어난 남편이 찾아 나온 적도 있다고 했다.

아직 아이도 없고 일도 나가지 않으니 그녀는 남편이 일하러 간 시간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많이 사랑해 주고 집안일도 잘 돌봐 준다고 한다. 그럼에도 낯선 곳에서의 생활은 만만치가 않다고 했다. 지인의 소개로 두 사람의 고향친구를 사귀었지만 그녀들은 모두 일하러 나가고 아이들도 있어 너무 바빠 자주 볼 수가 없고 이웃들과는 소통이 어려워 쑥스럽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 남편이 열심이 찾아 주었던 한국어교실에 가는 것도 쉽지가 않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요즘 선택한 것은 TV를 보며 한국어를 익히고, 텔레비전을 통해 밖의 세상을 보며 대한민국의 생활문화와 언어를 배우고 적응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오늘날 T와 같은 이주여성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이들에게 조금만이라도 관심을 가져준다면 그들이 새로운 사회에 정주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남편은 밤새 일하고 고달픈 몸을 이끌고 새벽에야 귀가하면서도 매일 편의점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커피와 간식을 사가지고 온다고 한다.

T와 맛난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녀의 낯빛은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미래를 설계하며 식사를 했기 때문이리라. 그녀와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상담을 하며 진로를 모색해 오고 있다. 이제 조금씩 나아지는 한국어에 힘입어 직장도 나갈 용기를 내려 애쓰고, 남편을 닮은 아기도 낳아 훌륭하게 키워 보고 싶다고 말할 때 그녀의 표정에는 설렘이 가득해 보였다. 자신은 외동딸이어서 아이를 많이 낳고 싶다고 한다. 그들이 설계해가는 인생플랜은 반드시 성공하여 한 아름다운 가정을 이끌어가고 이 사회에 좋은 시민으로 자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T는 유난히 눈이 깊고 착하고 예쁘다. 남편을 닮은 아이를 많이 갖고 싶어 하는 이 여인의 고운 마음씨는 우리사회가 바라고 희망하는 미래다. 그녀의 선함과 건장하고 순박한 그녀의 남편을 닮은 아이들이 많이 태어나는 행복한 가정을 상상해본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화목한 저녁식탁, 한국생활에 서툰 그녀를 배려하는 화기애애한 집안 분위기, 해맑은 자녀들로 하여 보다 힘차고 행복한 미래를 꿈 꿀 수 있는 가정이되기를 바라며 만추의 숲속을 그녀의 손을 잡고 걸어 나오는 나와 그녀의 가슴 속으로 쏟아지는 가을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서종남 한국다문화교육상담센터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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