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김포 3.1운동

김포시는 경기도의 북서부, 한강 하류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북동쪽으로는 파주시와 고양시에 접해있고,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을 끼고 개성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동쪽으로는 서울시, 인천시, 부천시와 접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강화도에 접하였다. 김포시 영역 내에는 높의 산은 없고 야트막한 구릉이 있어 김포시는 평야지대이며 삼면이 바다와 연해 있다. 주된 길은 조선시대에 강화로라 불렸던 서울에서 강화까지 이어지는 도로이며, 일제시기에 포장되어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식민지 수도 경성과의 접근성이 보다 원활해졌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김포지역의 항일운동은 바다를 중심으로 한 의병운동과 여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애국계몽운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포 최초의 의병은 1906년 10월경 고양군 파동과 마주한 고촌읍 풍곡리를 근거로 한 의병이었다. 1907년 8월 군대 해산 이후에는 해산 군인들이 의병화하여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또 같은 해 9월 30일에는 김포에서 서쪽으로 16리 떨어진 녹도(鹿島)에서 의병 200여 명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일본군을 전멸시킨 전과를 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의병은 어느 한곳에 머물면서 일본군과 항전한 것이 아니라 항상 이동을 하기 때문에 김포의병은 이웃한 통진과 강화지역의 의병과 일치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특히 바다를 주 무대로 한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주목되는 것은 1907년 12월 3일 임촌면 장천리 윤병구에게 ‘의병사자(義兵使者)’라 칭하고 의병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다음 날인 4일에는 읍내에 격문을 부쳐 의병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김포지역의 의병은 활발하게 활동하였는데 성주현의 연구에 따르면 기록상 확인 가능한 의병이 1909년까지 모두 26건에 달하며, 군자금 조달 활동은 15건이 보고되고 있다. 기록되지 않은 것까지 하면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국채보상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김포지역에서는 양천군에서 21개 동과 보통학교, 통진군에서는 32개 동, 김포군에서는 40여 동에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음이 확인된다. 1906년 금릉학교가 설립된 이래 신명야학교, 분양학교, 분남학교, 분남보성학교, 광진학교, 신명의숙, 영성학교 등도 설립되어 근대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이전에 김포지역에서는 일제의 항거하는 의병활동과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김포지역 3·1운동이 대중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주체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오라리장터

김포지역에서 3·1운동은 1919년 3월 22일 월곳면 군하리와 검단면에서 시작되었다. 3월 23일에는 양촌면 오라리장터와 양동면의 가양리, 24~25일에는 고촌면, 26일에는 군내면 감정리와 읍내, 27일에는 양촌면, 29일에는 월곶면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박용희가 성태영, 이병린에게 독립운동을 권유하면서 월곶면의 3·1운동은 박용희, 성태영, 백일환, 이살눔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살눔이 성태영, 박용희, 조남윤, 윤종근, 최복석에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는 기록도 있어 그 전말에 대해서는 향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살눔은 경성예수학교 학생이었으므로 군하리의 3·1운동은 기독교의 영향 하에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충서

오라리장터의 만세운동은 양촌면 누산리 출신의 박충서, 박승각, 박승만, 안성환, 전태순 등을 중심으로 한 조직과 대곶면 초원지리에서 서당을 설립하고 학생을 가르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던 정인섭, 임철도를 중심으로 한 두 개의 조직에 의해 주도되었다. 박충서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학생으로서 경성에서 전개되었던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일제 경찰은 서당훈장인 그의 아버지 박승혁에게 강권하여 그를 귀향시키도록 하였다. 이는 박충서가 일제 경찰의 주목을 받을 만큼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귀향 이후 박충서는 삼촌인 박승만과 친지인 안성환, 전태순 등과 협의하여 3월 19일 안성환의 집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모이라.”는 취지의 통문 수 십 통을 작성한 후 오인환과 양촌면 학운리의 외가친척인 정억만 등 7인을 획득하여 책임부서를 정하였다. 이들은 3월 23일 오라리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를 부르기로 한 후 작성한 통문을 양촌면 각지에 배포하여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들이 주재소의 통신선을 절단하여 경찰의 통신을 마비시키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비록 실패하였으나 이 계획은 이들이 만세운동을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또한 대곶면 초원지리의 정인섭은 3월 22일 임철모의 집에서 3월 23일의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였다. 정인섭은 무명천에 ‘독립만세’라 쓰고 태극기 한 장을 그린 후 3월 23일 오라리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살눔 세력과 정인섭 세력이 오라리장터 만세운동을 사전에 함께 준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시위를 계획한 것은 김포 지역민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만세운동의 결과 박승서, 박승각, 박승만, 정억만, 안성환, 전태순, 오인환과 정인섭, 임철모 등이 체포되었다. 이에 해산하였던 시위 군중들은 체포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주재소를 포위하고 격렬하게 시위하다 다음날인 3월 24일 오전 7시경 해산하였다. 그리고 이 시위에서 다시 6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상 살펴본 김포지역 3·1운동의 특징은 첫째, 시위가 평화적인 방법에 의하여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대략 3월 말 4월 초가 되면 3·1운동은 수원이나 안성의 경우와 같이 폭력화하였으나 김포지역의 시위는 여전히 온건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주재소, 면사무소 등 일제의 말단 지배 기구를 옮겨다니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던 것으로 보아 일제에 직접적으로 우리의 독립 의지와 의사를 전달하려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오라니 장터 만세운동의 경우 박충서 등이 조직을 갖추어 준비를 했다고는 하나 이는 대중을 동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만세운동의 참가를 독려하는 수준이었다고 판단된다. 수원의 사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구장이나 지역사회의 종교지도자 등이 전면에 나서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박충서 그룹은 그의 일가친척이 조직의 중심이 되고 있으며, 정인섭은 ‘정씨네 땅을 밟지 않고는 마을을 제대로 오갈 수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의 지주였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즉 김포지역의 3·1운동은 지역 단위의 조직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식을 갖은 지역사회의 유지, 유식자들이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만세운동에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김포지역의 3·1운동이 일정하게 경성의 3·1운동 지도세력과 연계를 맺고 있을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충서와 이살눔은 경성에서 학교를 다니던 학생이었다. 그들이 어떠한 이유에서 고향인 김포로 내려왔는가는 명확하지 않다. 박충서의 경우 아버지의 강권이라 하였으나 이는 표면적인 이유이고 이를 빌미로 경성의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낙향하였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갖는 김포지역의 3·1운동에서 특이한 점은 군하리 만세운동의 주도장 중 한 사람인 백일환이 ‘독립만세의 의미는 舊 대한국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3·1운동은 투쟁을 통해 독립을 한 연후 공화제 정부를 조직하려는 목적을 가진 근대적 의미의 운동이라 정의되지만 김포지역에서는 구 대한국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사례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향후 3·1운동 연구의 또 다른 의미에서의 연구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만세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김포지역의 일제의 말단 지배 기구는 이에 어떻게 대처하였는가?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응이 지역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김포지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단편적으로 보이는 사례를 통해 일제의 대응 방식을 유추할 수 있다. 김포의 경우는 군수와 면장 등이 시위가 심한 현장을 찾아 민심을 무마했고, 이에 따라 인근의 고양과 부평 지역민이 피난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며, 경성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검사국에 송치되었던 한 학생의 부친이 선처를 요청하여 무죄방면시켰다는 사례를 보도하여 김포지역의 민심을 달래려 하였다. 더 나아가 5월 3일에는 김포공립보통학교에서 청년강화회를 개최하여 청년지도에 나서 일제의 식민지배체제를 안정시키려는 노력을 했다는 정도이다.

이렇게 전개된 3·1운동의 결과 우리는 희망을 바로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은 ‘희망’을 달성할 수 있다는 또 다른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지식인 중심의 우리 민족운동은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 등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또 나라 밖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우리의 ‘희망’을 하루라도 빨리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3·1운동은 새로운 세력에 의해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성운 경기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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