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3년(순조 3) 가을 어느날. 강진 읍성 동문 밖 주막의 작은 방에 거처하는 정약용은 관아의 아전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이들은 조금 전 강진 관아에서 있었던 끔찍한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주막집의 주모 아들이 강진 관아에서 근무 하는 하급 서리였기 때문에 이 주막에는 아전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관아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들이 본 충격적인 사건은 바로 한 여인과 그녀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날 아침에 강진 관아 앞에 행색이 초라한 한 여인이 피로 물든 작은 천을 들고 왔다. 그녀는 강진만의 갈밭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3일 전 아들을 낳은 산모였다. 산후조리를 하고 있어야 할 여인이 관아에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온 것부터가 기이한 일이었다. 이 여인은 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군수와 아전들은 나오라!”며 미친 듯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지기들이 막아 관아의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들자 그 여인은 관아 정문에 피로 물든 작은 천을 던졌다. 그 순간 작은 살점 하나가 튀어 나왔다. 그것은 바로 남편의 양물(陽物)이었다.

그녀의 기구한 사연은 이렇다. 사내아이를 낳은 지 불과 3일 만에 강진 관아 병방(兵房) 소속의 아전이 찾아와 갓난 아이를 군적(軍籍)에 올렸다. 이른바 19세기에 만연하던 ‘황구첨정(黃口簽丁)’이라는 것이다. 원래 군적에 올라가면 세금인 군포(軍布)를 납부해야 한다. 군포 납부는 군역의 의무가 있는 16~60세의 남자들만 해당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갓난 아이는 당연히 군적에 올라야 할 이유도 없고 군포를 납부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는 국법에 명시돼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지방의 수령부터 아전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해갔다. 당시에 갓난 아이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은 이들에게도 군포를 부과해 ‘백골징포(白骨徵布)’라는 말까지 나오게 됐다. 이처럼 탐관오리들은 국가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백성들을 수탈하는데 눈이 멀었다.

여인의 남편은 강진의 아전들에게 “갓난아이의 군포 부과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항의 했다. 그러자 아전들은 “3년 전 죽은 당신의 아버지도 군포를 납부해야 한다”며 오히려 협박을 했다. 남성은 수차례 억울하다고 하소연을 했지만, 아전들은 오히려 군역에 대한 세금을 가지고 간다며 외양간에 있던 소를 끌고 가버렸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양물을 바라 보며 “내가 자식을 낳은 것이 죄로구나. 이것 때문에 곤욕을 치르니 말이다”라며 그 순간 칼을 들고 나와 자신의 양물을 잘라 버렸다. 그리고는 하체에서 나오는 폭포수 같은 핏물에도 개의치 않고 사람들 앞에서 “나는 이제 더 이상 남자가 아니니 나에게 군포를 부과하지 말라!”고 울부짖었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정약용은 갈밭 마을의 한 사내가 양물을 잘랐다는 아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충격을 빠졌다. 그는 전쟁에 나간 지아비들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사내가 세금 때문에 자신의 양물을 잘랐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식을 나은 죄 때문에 한 남성이 양물을 잘라야 하는 비극적인 상황에 정약용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는 이후 “부호들은 일 년 내내 풍류나 즐기면서 낱알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는데 똑같은 백성을 두고 왜 그리도 차별일까”라며 양물을 잘라낸 남성의 슬픈 이야기를 ‘애절양(哀切陽)’이란 시로 남겨 놓았다.

오는 17일부터 시행될 예정이었던 ‘카카오 카풀’ 서비스에 반대하던 한 택시기사가 자신이 몰던 택시 안에서 스스로 분신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너무도 안타까운 죽음이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늘 가난한 이들만이 고통을 받는다. 택시업계는 택시노동자의 분신을 계기로 강경 투쟁에 나섰고, 급기야 카카오는 카풀 서비스 연기를 검토한다고 밝혔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전 세계적인 공유경제의 흐름 속에 도입된 카풀 서비스는 좋은 도입 취지에도 불구하고 택시기사들에게 생존권 위협을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이 문제를 단순히 시장의 논리에만 맡기지 말고 최선을 다해 중재하기 바란다. 양측이 상생의 묘를 찾지 못하고 극한대립으로 이어질 경우 결국 그 피해는 대다수의 국민들의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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