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가로 내려오는 맥 변화무쌍… 일제에 저항한 기세 엿보여
우물 있는 쪽 분수령에 해당… 지기가 모인 혈에 세워진 집 특별한 모양 없는 안산이 흠

만해 한용운(1879~1944) 생가는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2(만해로 318번길 83)에 있다. 스님은 청주한씨 집안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온양방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유천이고, 법명은 용운이며 법호는 만해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의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으며 14세 때는 전정숙과 결혼도 하였다.

의인이 되고자 했던 만해는 1894년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여기저기 방황하며 다녔다. 속리산 법주사와 오대산 월정사에 머무르다가 18세 때는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당시는 신분이 처사이므로 절의 허드렛일을 하며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 선(禪)을 닦았다. 그러다가 고향으로 내려와 처가에서 2년 동안 머물렀는데 이 과정에서 아내가 임신하여 1904년 아들 보국이 태어났다.

26세 되던 해(1905년) 다시 집을 나와 설악산 백담사에 출가하였다. 아예 속세와 인연을 끊고 스님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일에 관심이 많아 세계여행을 계획하고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와 교토 등을 돌며 신문물을 시찰하다 도쿄 조동종 대학(고마자와 대학)에서 6개월간 불교와 서양철학을 수강하였다. 1910년 귀국해서는 32세 나이로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1년 일제는 조선사찰령을 만들어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귀속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만해는 석전 박한영 등과 전국31본사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이를 규탄하고 무효화시켰다. 이때부터 총독부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그러자 만해는 블라디보스톡,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이때 일본 밀정으로 오인 받아 교포로부터 총격을 당하기도 했다. 1913년 귀국하여 불교의 현대화에 노력하였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 바람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내며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개혁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만해는 부인이 있는 대처승이다. 1933년 55세에는 21세의 연하인 유숙원과 재혼하여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 살면서 딸 한영숙을 낳았다. 당시 유숙원은 간호원 출신 노처녀였다. 만해는 69세 때인 1944년 중풍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유골은 화장한 후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며, 옆에는 1965년 사망한 부인 유숙원의 묘가 있다.

만해 생가 주산은 형산(209.6m)이다. 금북정맥이 오서산에서 일월산(394.3m)을 향해 북진하다가 맞고개에서 서쪽으로 맥을 뻗어 보개산(274m)을 만든다. 그리고 서해안고속도로를 지나 형산을 세웠다. 산세가 반듯하고 위엄이 있다. 여기서 평산마을로 내려온 맥이 한용운 생가 뒷산을 만들었다. 야트막한 흙산으로 풍수적으로는 현무에 해당한다. 여기서 생가 쪽으로 내려오는 맥은 변화가 상당하여 기세가 있어 보인다. 만해의 시적 감성과 굽힐 줄 모르는 기개가 동시에 느껴지는 용맥이다.

생가 뒤로 가면 맥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복원공사로 흙을 파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분수령을 찾으면 된다. 분수령이란 비가 올 때 빗물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을 말한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고일촌산’ 즉 1촌만 높아도 산맥이라 했으니 분수령이 맥이 되는 것이다. 이곳의 분수령은 우물이 있는 쪽이고 그 맥이 부엌을 통해 안방으로 연결되었다. 안방이 혈에 해당되는데 그 이유는 맥의 끝자락이란 점이다. 대개의 혈은 산맥 끝자락에 있는 법이다.

산맥이 흐름을 멈추어 끝자락이 되려면 앞에 물이 가로로 흐르거나 두 물 사이에 있어야 한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우측 사당 쪽의 골짜기와 왼쪽 시비공원 쪽의 골짜기가 집 앞쪽에서 합수한다. 두 물 사이에 생가가 있으므로 지기가 모인 혈에 해당된다. 지기를 보호하기 위해 사방으로 산들이 감싸고 있다. 특히 오른쪽 백호가 왼쪽 청룡에 비해 좀 더 다정하다. 청룡은 반배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답지는 않다. 앞의 안산도 우뚝 솟았지만 특별한 모양을 하고 있지는 않다. 이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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