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원만하다 함은 타인과의 사이에 탄탄하고 반듯한 통로를 냈다는 말이겠다. 걷는 길이든 진리나 깨달음의 길이든 도(道)를 이루는 요체는 그 길을 부지런히 다지는 노력, 꾸준함이겠다. 루트(route)는 길이고 방법이다. 늘 걸어야 생기는 길 루트에서 유래한 말 루틴(routine)은 그래서 일상적, 기계적, 관례, 절차 등을 뜻한다.

루틴은 컴퓨터용어로 채용되어 ‘어떤 일을 담당하는 하나의 정리된 일이나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크고 작은 여러가지 루틴의 조합이다. 전체의 개략적 구동에 관여하는 포괄적 프로그램을 메인루틴이라 하며, 이 메인이 하부의 분야별 서브루틴을 불러서 돌린다. 메모리의 효율적 사용은 메인루틴과 서브루틴 사이를 얼마나 잘 구획 편성하였나에 달렸다.

이 잘 정리된 프로그램 가리키는 말 루틴은 종종 부정적 의미로도 쓰인다. ‘루틴한 일’은 대체로 일상적 관례적 업무를 가리킨다. 직장에서 곤혹스러운 일은 수치만 다를 뿐 같은 일과 같은 보고를 루틴하게 반복하는 것이다. 루틴한 업무라 보고를 생략하면 이 때는 발표한 게 없어 마음이 불편하다. 다른 부서가 농담으로 루틴해서 지겹지 않냐, 뭐 할게 있냐고라도 하면 속상하다. 가끔은 이 일이 정말 큰 기술 없이 누구나 처결할 수 있는 기계적 단순업무인가 싶어 불안하기도 한다.

한편 무언가 개선과 효율화에 의욕이 있는 부서장은 직원들의 암묵지를 끄집어 내고 시스템화를 추진하는데, 이를 달리 말하면 루틴화이다. 일이 지루하건 말건, 창조적이건 아니건을 떠나 부서장은 루틴을 주문한다. 반복적 업무는 루틴하다고 무시하면서도, 동시에 창조적 발상으로 업무의 루틴을 짜라고 독려한다. 마치 루틴에 서로 다른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만 같다.

일의 반복적 수행은 매너리즘인가? 루틴의 본래적 의미에 견주면 루틴한 일 처리가 매너리즘일 리 없다. 일의 반복이 단순함이나 변화의 거부는 아니니까. 루틴한 일에 부정적 의미가 붙은 것은 단순한 일과 반복적 일의 혼동에 기인한 것 같다. 여기에는 루틴이 주로 컴퓨터 프로그램 용어로 사용된 탓도 더해진 듯하다. 컴퓨터야말로 인력 소요 없이 단순하고 기계적이니까.

루틴한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특별한 것은 정말 특별하다. 그런데 찬찬히 생각하면 이 특별이란 것은 수많은 일반, 보통, 통상, 대체적인 것들이 있어야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특별대책은 여러 통상적 대책을 바탕으로 깔고, 그 위에 부분적 또는 일시적으로 내놓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대부분 성취는 대개 평범한 루틴의 지속적 수행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당뇨약 복용하길 1년이 넘었건만, 오히려 살은 차츰 빠지고 눈 침침하며 피부는 거칠어졌다. 규칙적으로 꾸준히 걷어야 한다는 지침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때문이다. 반면 친구는 먹던 당뇨약 끊을 정도로 건강이 좋아졌다. 그는 의사의 권고를 꾸준히 루틴으로 돌렸고,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다.

세상의 위대한 이들은 모두 묵묵히 열심히 루틴을 돌렸다. 그 성과가 기록이든 기술이든 과학이든 문화든, 고집스레 루틴을 반복 수행한 결과이다. 평창동계올림픽 컬링의 영미 신화는 루틴화의 성과를 잘 드러낸다. 지겨운 연습을 몇년씩 루틴하게 반복 또 반복하였다. 루틴의 지속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그래서 공자도 “오래도록 하는 이가 없다”(民鮮能久矣)며 실천의 어려움을 말씀하셨다. 예절도 품성도 관계도, 몸에 익고 마음에 새겨지도록 루틴의 능구(能久)가 답이다.

한해가 저물었다. 돌아보니 올해도 역시 작심삼일(作心三日)이었다. 잘 짠 루틴을 연초에 잠시 돌리다 말았다. 중년의 성인병 다스리겠다는 운동도, 생각의 가지를 쳐 곧추세우겠다는 독서도 다 헛된 다짐이 되었다. 역시 플랜보다 액션이라, 끊임없는 루틴의 수행이야말로 만사의 왕도이다.

유호명 경동대학교 대외협력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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