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2월9일 정약용은 의금부 감옥에 갇혔다. 천주교를 신봉한 대역죄인이라는 이유였다. 정조의 죽음으로 숨이 멎듯 조용했던 조정은 국상(國喪)이 끝나자마자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순조 즉위 후 새로운 집권 세력들은 정약용을 비롯한 정조의 측근들을 정치적으로 파멸시키기 위해 천주교를 명분으로 내세워 대상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 천주교 ‘교난(敎亂)’은 사실상 정약용이 구금되기 한 달여 전 수렴청정을 하던 영조의 계비 정순대비의 하교로 시작됐다. 천주교인들은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이 인륜을 파괴하는 사람들이니, 이들을 찾아내 처벌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특히 코를 베어 죽여서 씨도 남기지 말라고 하교를 내렸다. 이는 정권 강화 차원에서 정치보복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정순대비는 정조 재위 시부터 정조 반대세력들의 정치적 맹주가 됐고, 사사건건 정조의 개혁을 방해했다. 정조가 죽은 후 11살의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면서 스스로를 ‘여주(女主)’로 자처하며 정국을 주도했다. 정조의 국상 중에는 어떠한 행위도 할 수 없었지만, 장례가 끝난 후에는 더 이상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제거하고자 하는 핵심 대상은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3명이었다. 이가환은 성호 이익의 종손이었고,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다. 조정은 이 세 사람을 천주교 신도로 몰아 세웠다. 하지만 이미 이들은 천주교를 완전히 떠났고, 공개적으로 천주교를 믿지 않는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심지어 당시 노론 벽파의 맹주인 심환지는 정약용의 천주교 비판 글을 보면서 ‘천하의 명문(名文)’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가 1795년 윤2월 화성행차를 마치고 조정의 모든 신하들 앞에서 향후 이가환과 정약용을 정승으로 임명하겠다고 선언하자 노론들은 이들을 반드시 제거하고자 했다. 결국 이들을 주 대상으로 한 옥사(獄死)가 잔인하게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고문이 자행됐다. 이가환은 고문을 받던 중 끝내 죽고 말았다.

이때 정순대비가 임명한 재판관이 ‘이병모’였다. 이병모는 비록 노론 계열이었지만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천주교 죄인으로 잡혀 온 정약용을 심문하게 됐는데, 전부터 정약용과는 잘 아는 사이였지만 과거의 인연 때문에 편의를 봐줄 처지가 아니었다. 천주교라는 ‘사학(邪學)’을 심판하는 자리이자 정치 재판이었기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정약용은 정조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에 홍희운이 이야기하듯 천명, 만 명을 죽여도 정약용 하나 죽이지 못하면 옥사는 의미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정약용을 죽이려는 분위기가 강했다.

하지만 이병모가 볼 때 개인적인 친분을 떠나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는 증거는 차고도 넘쳤다. 그래서 이병모는 조정의 엄청난 압력에도 불구하고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임금에게 보고했다. 이로 인해 다행히 정약용은 억울한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됐다. 이병모의 합리적 재판으로 정순대비도 어쩔 수 없이 정약용을 유배 보내는 선에서 정적 제거를 마무리 했다.

최근 대법원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 농단 의혹에 연루돼 징계 절차에 넘겨진 법관 13명 중 8명만 징계하기로 결정해 논란이다. 지난 6월 김명수 대법원장이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감수 하겠다”며 징계 절차에 회부, 5개월 간 심의한 결과 정직 3명, 감봉 4명, 견책 1명, 불문(不問) 2명, 무혐의 3명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각종 재판거래 의혹 등이 드러났음에도 최고 수위의 징계(정직1년)를 받는 법관은 아무도 없었다. 이들 두고 언론은 물론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를 ‘솜방망이 징계’라고 비판하고 있다. 징계에 회부 됐던 이들은 재판관으로서 공정한 재판 대신 권력자들을 옹호하고 이들의 힘을 지키는데 도움을 주었던 인물들이다. 조선 시대 이병모는 정권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합리적 판결을 내려 존경을 받았지만, 현 사법부는 지난 정권에 기생했던 법관들을 사면해준 셈이 됐다. 사법부가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스스로 신뢰도를 떨어뜨린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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