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8년(정조 2) 1월 1일 자정. 천지가 온통 어둠으로 가득했으나 창경궁은 궐내에 켜놓은 횃불로 인해 대낮과도 같이 밝았다. 자정을 지나 새해 첫날이 시작되자 정조는 설날에 하는 ‘삭제(朔製·문신들에게 시문을 짓게 하는 시험)’를 주관하기 위해 선대 국왕인 영조의 위패가 봉안된 효명전(孝明殿)으로 갔다. 이와 함께 정조는 이곳에서 예조판서 이경호의 안내를 받아 초헌관으로 제사를 지낸 뒤 침전으로 돌아가 잠시 잠을 청했다.

이후 날이 밝자 정조는 역대 국왕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는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고, 다시 효명전으로 가서 주다례를 행했다. 조선 왕실에서는 선원전을 역대 국왕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종묘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새해의 종묘대제(宗廟大祭)를 치르기 전 먼저 선원전에서 역대 국왕들에게 새해가 왔음을 알리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한 것이다.

1776년 3월에 영조의 뒤를 이어 조선의 국왕이 되었으니 이날은 정조가 국왕이 된 지 햇수로 3년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이전 국왕들과 달리 새해 첫날 백성들을 위한 특별 신년사인 ‘윤음(綸音)’을 전국에 하교 했다. 정조는 이날 신년사에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아! 내가 정사를 시작할 때 책임지고 잘 해 보겠다고 다짐했는데, 선왕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독실하지 못하고 크게 변화시키는 아름다움이 드러나지 않아 풍속이 어그러져 인재(人才)가 흥기하지 못하고 기강이 무너져 재용(財用)도 고갈됐다. 게다가 반역의 무리들이 연이어 생겨나 국세(國勢)가 안정되지 않으니, 오늘날의 정세를 옛날과 비교하면 어느 때에 해당하겠는가. 과인이 부덕해 큰일을 하기에 부족하다 하더라도, 모든 직위의 백관들은 어찌 각자의 자리를 공경히 지키고 맡은 직분을 생각하며, 나 한 사람을 받들지 않는가. 더구나 지금 새해가 돼 봄기운이 돌아 만물이 모두 소생하고 있다. 천도(天道)는 만물을 발육시키는 계절에 이르렀고 왕정(王政)은 유신(維新)해야 할 기회이니, 시기에 맞게 만물을 발육시켜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정조의 이런 신년사는 자신이 아무리 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국왕이 됐다 하더라도 짧은 시간에 국가의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털어 놓은 것이다. 특히 인조반정 이후 오랫동안 노론이 권력을 독점해 온 상황에서 자신이 국왕이 된 지 만 2년도 안 된 상황에서 자신을 견제하는 신하들로 인해 제대로 개혁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했다.

정조는 그간의 적폐를 청산하는 기간이 5년 혹은 7년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백성들이 나라의 개혁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만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을 부족한 국왕이라고 낮추어 이야기하면서도, 지금이야말로 국가 개혁을 추진할 때라고 강조한 것이다.

개혁의 의지를 천명한 정조는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경제활성화 정책을 제시했다. 농업과 잠업(蠶業)을 활성화 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만들고, 백성들이 국가의 토목공사에 강제로 노동을 강요당하는 각종 요역과 과도하게 부과되는 세금을 가볍게 해주는 정책을 마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통해 가혹하게 수탈당하는 고통을 없애고, 백성들의 살림을 넉넉하게 해 안정된 생활의 즐거움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국왕 혼자 할 수 없기에 중앙의 관리들과 지방의 관리들이 모두 함께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여 년 전 집권 3년 차를 맞은 정조가 신년사를 통해 개혁과 민생을 강조했듯이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일 신년사를 통해 민생 활성화와 한반도의 평화를 무엇보다 강조했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 역시 ‘비핵화’를 직접 언급하며 아무런 전제조건이나 대가 없이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정조가 ‘백성들이 일정한 생업이 있으면 일정한 마음이 있게 된다(有恒産則有恒心)’ 라고 맹자의 말을 인용해 강조했듯 남북한의 국가 지도자와 정치인, 공직자들이 정파와 이념을 초월해 경제 활성화를 이끌고,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켜 모든 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