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용어에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정의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주로 한 음과 다음 음 사이를 이을 것인지 끊을 것인지, 또 잇는다면 어떻게 이을 것이고 끊는다면 어떻게 끊을 것인지를 일컫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 음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뉘앙스를 입혀 연주할 것인지에 대한 심미적 판단도 이 용어의 범주에 포함된다. 보다 실제적으로 말하자면, 건반악기는 손가락으로 타건(touch)을 어떻게 할 것인지, 현악기는 오른손으로 활쓰기(bowing)을 어떻게 할 것인지, 관악기는 혀로 텅깅(tonguing)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주로 아티큘레이션의 영역에 들어간다. 아티큘레이션을 예술적으로 설득력 있게 연출해내는 것은 훌륭한 연주를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원래 아티큘레이션이라는 말은 언어의 발화 행위와 관련된 용어로 시작되었다. 영어를 비롯한 구미언어 사용자들은, 말을 또박또박 조리 있게 상대방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을 아티큘레이션이 좋다고 칭찬한다. 반면에 구사하는 단어의 발음이 흐리멍덩하고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불분명한 사람은 아티큘레이션이 나쁘다고 폄하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명료하고 조리 있게 언어를 구사하여 상대방과 좋은 의사소통을 이룰 수 있듯이 음악가들도 음표들을 명료하고 설득력 있도록 표현하여, 즉 좋은 아티큘레이션으로 연주하여 청중과 좋은 교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지난 1월 11일 경기문화의전당에서 열린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는 무엇보다도 바로 이러한 좋은 아티큘레이션의 연주를 들려주었다. 먼저 베토벤의 중기 걸작인 제 5번과 6번 교향곡만으로 깔끔하고도 무게감 있게 프로그래밍한 것에서 지휘자 마시모 자네티의 명료한 메시지와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1부에 연주된 제 6번 소위 <전원교향곡>은 동장군의 기세에 얼어버린 청중의 마음을 만물이 소생하는 새 봄의 온기로 녹이는 듯 하였으며, 2부에 연주된 제 5번 교향곡은 새해를 힘찬 희망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환희와 승리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5번 교향곡을 보다 아니무스(animus)적이고 전원교향곡을 보다 아니마(anima)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특히 전원교향곡의 연주는 그 아니마적 성격을 매우 잘 살린 명연이었다. 동일한 화음이 오래 지속되고 똑 같은 리듬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자칫 지루하게 들릴 수 있는 제 1악장은 나긋나긋하고도 생동감 넘치는 현악기의 아티큘레이션과 매우 적절하게 돋보이도록 꿈틀거리고 부단히 운동하는 목관악기의 선율처리가 마치 모성의 자연(mother nature)을 소리의 풍경화로 옮겨놓은 듯 하였다. 제 2악장은 “시냇가의 정경”이라는 부제와 걸맞도록 지나치지 않으면서도 생동감 있는 다소 빠른 템포에 목관악기 솔로들의 여유로운 봄 기지개가 어우러져 듣는 이의 호흡이 깊어지고 이완되도록 마법을 걸었다. 한편, 모든 악기들이 생기를 가지고 움직이는데도 어디 하나 지나침 없이 완벽한 밸런스를 만들어내는 신묘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 마치 수십 년 호흡을 같이해온 연륜 있는 현악사중주의 연주를 듣는 것처럼 대규모 교향악단이 실내악의 아기자기함과 유연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자네티와 경기필의 5번 교향곡 연주는 20세기에 이 곡과 관련하여 유행했던 지나친 무게감과 부적절한 낭만성에서 탈피하고 보다 명확한 아티큘레이션과 유연한 다이나믹으로 고전적 사운드를 선사하였다. 현악기의 비브라토 사용이 지나치지 않았던 것도 이에 일조하였다. 특히 필자의 주목을 끈 것은 전반적인 템포였는데, 베토벤이 그의 필사본에 명시한 각 악장의 메트로놈 기호를 지휘자가 매우 존중한 흔적이 보였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베토벤 사후 오늘날까지 묵직하고 기름진 소리를 내기 위해 많은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베토벤이 직접 적은 템포기호를 가볍게 여기고 상당히 느리게 연주해온 관례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템포를 빠르게 진행시키면 음악의 구석구석 존재하는 세세한 움직임들이 잘 표현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자네티와 경기필은 명료한 아티큘레이션과 각 악기군 간의 세심한 밸런스 처리로 16분음표와 32분음표가 꿈틀거리는 이 곡의 미시적 세계를 4D 스크린 화면처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우리의 일상의 대화가 진정한 대화가 아닌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 하는 독백의 물리적 교환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음악회장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음악세계에만 매몰되어 있어 열심히 무언가를 무대에서 하지만 청중의 마음을 매만지지 못하는 공연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필자는 이번 경기필의 신년음악회에서 무대와 청중의 대화가 살아있는 소통의 장을 목격하였다. 명료하고 의미 있는 프로그래밍과 해석으로 자신 있게 대화의 문을 연 마에스트로 자네티, 그리고 한 음 한 음 정성스레 소리의 꽃을 피워 청중에게 선사한 경기필의 단원들 모두 청중의 열정적인 환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였다. 무대에 선 이들도, 무대를 바라보는 이들도 모두 행복한 얼굴을 한 것을 필자는 흐뭇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좋은 아티큘레이션을 통한 소통과 감동의 연주, 그것을 남은 올해에 아낌없이 선사하겠다는 경기필의 명료하고 당찬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다. 음악인의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경기필이 더욱 도민의 사랑을 받고 온 국민의 귀감이 되며, 세계 무대에 당당히 자리매김 하는 도립예술단으로 발전해가기를 바란다.

양승열 지휘자·열정악단 음악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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