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5년(숙종 1) 3월 12일 청풍부원군 김우명이 어전회의에서 왕족인 복창군과 복평군이 궁중의 나인들을 겁탈해 자식까지 낳았으니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숙종에게 간언했다. 김우명은 현종의 왕비인 명성왕후의 아버지로, 숙종에게는 외할아버지였다. 이렇게 비중 있는 인물이 조선왕실의 비리를 거론했으니 조정은 발칵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흔히 ‘3복(福)’이라 불리는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楠),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은 인평대군의 자식들로 효종조에는 왕의 조카로서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며, 현종조에는 왕의 종형제로서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따라서 궁중 출입 또한 매우 자유로웠다. 특히 외아들로 가까운 친척이 많지 않던 숙종에게는 골육과 같은 왕실의 지친이었다. 이처럼 역대 국왕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복평군의 형제들은 날로 오만해지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두 왕족이 겁탈한 여인은 군기시의 서원(書員) 김이선의 딸 상업(常業)과 내수사의 종 귀례(貴禮)였다. 김우명의 간언 1년 전인 1674년(현종 15) 2월에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가 승하해 국장이 진행됐다. 이때 장례 준비를 하러 궁중에 들어간 복창군은 한창 일하고 있던 김상업을 보고는 어두운 전각으로 끌고 가 그를 겁탈했다. 평상시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국상(國喪) 중에 이런 파렴치한 행동을 한 것이다. 며칠 뒤 현종이 왕족들을 불러 인선왕후의 개인 소장 물품을 보여주는 자리에서 김상업은 복창군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자신을 겁탈한 사람이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임금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김상업의 놀란 모습을 유심히 본 현종은 분명 복창군과 연관돼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명확한 조사를 실시하거나 훈계하지 않았다. 만약 현종이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이후부터는 왕족들이 절대로 궁중의 나인들을 욕보이지 말라고 지시했을 것이다.

복창군 동생 복평군 역시 궁중에 들어와 귀례를 겁탈했다. 귀례는 내수사 소속으로 인선왕후의 국상 한 달 전 현종의 왕비인 명성왕후의 병환 때 차를 가져다 준 인물이다. 이 당시 병문안을 왔던 복평군은 귀례를 보고는 손목을 잡고 희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명성왕후의 병문안을 핑계로 수시로 궁중으로 들어와 귀례에게 차를 가져오게 했고, 어느 날 중전 옆 전각인 회상전(會祥殿)에서 그녀를 겁탈하고 말았다. 엄청난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궁중의 힘없는 궁녀는 전혀 대항할 수 없었다. 이 두 궁녀는 수시로 복창군 형제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해 아이까지 낳게 됐다. 조선시대 궁녀들은 모두 국왕의 여인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손을 대서는 안 되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아무 거리낌 없이 악행을 저지른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행동을 현종과 명성왕후 모두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은연중에 이러한 비리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과 가장 가까운 왕족들이 이 문제로 인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침묵하고, 신하들이 알지 못하게 사실을 은폐했다. 그러니 복창군 형제들은 국왕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들을 비호하던 현종이 죽자 이들의 악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당대 최고 원로대신인 김우명이 이들에 대한 죄악을 공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숙종은 두 형제에 의해 고통을 받은 궁녀들에 대해 사형을 감면하는 처분을 하고, 복창군 형제를 유배 보냈다. 그리고 몇 년 뒤 역모사건에 얽힌 것과 함께 궁녀 성폭행 사건을 병합하여 사약을 내려 죽게 했다.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 백성들을 수탈하고 궁중 여인을 노리개 취급했던 그들은 끝내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은 것이다.

최근 여자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와 전 유도선수가 자신들을 지도하던 코치에게 성폭행 당했다고 증언하면서 우리나라 체육계의 성폭행 문제가 중요한 사회 이슈가 되고 있다. 급기야 지난 15일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대한체육회 성폭력 가해자 영구제명 및 국내·외 취업 원천 차단, 성폭력 예방 및 피해자 보호를 위한 구조적 개선 방안 확충 등의 대책을 발표했다. 뒤늦은 대책 마련에 아쉬움이 남지만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와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고, 재발방지를 위해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감시자로 나서야 이 문제를 근절할 수 있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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