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인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추탄 오윤겸(1559~1636) 묘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산5(오산로61번길 29)에 위치한다. 약 7천 평에 이르는 넓은 묘역에는 오윤겸의 조부(12세)·부모(13세) 묘를 비롯하여 20세 후손까지 20여기의 묘가 있다. 약 300년의 시간을 두고 조상과 후손들의 묘가 능선마다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비석을 보면 대부분 높은 벼슬이어서 해주오씨 추탄공파가 크게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오산리라는 지명도 해주오씨 묘역이 있다고 해서 비롯된 것이다.

해주오씨의 시조는 오인유로 고려 성종 때 송나라에서 귀화해 해주에 터를 잡았다. 오인유의 후손 중 8세 오희보가 고려 말 대호군을 지냈는데, 말년에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학일리 정착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용인과 안성 일대로 퍼졌다. 학일리에서 오산리로 입향한 사람은 오윤겸의 부친인 오희문(1539~1613)이다. 당시 모현면 일대는 포은 정몽주의 후손인 영일정씨, 저헌 이석형 후손인 연안이씨들이 세거하고 있었다. 오희문은 문천군수를 역임한 연안이씨 이정수의 딸(이석형의 증손녀)과 혼인하여 오산리에 터를 잡았다.

이후부터 자손들이 번창하였다. 해주오씨는 조선시대 문과급제 98명, 영의정 1명, 우의정 1명, 대제학 3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이중 영의정(인조 때 오윤겸), 삼학사(병자호란 때 오달제), 대제학(숙종 때 오도일), 우의정(영조 때 오명항)을 오산리에서 배출했다. 오윤겸은 선조 15년(1582) 과거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정철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어 활동하였다. 광해군 때는 사신으로 일본에 가서 150명의 포로를 데려왔고 국교를 정상화 시켰다. 인조반정 후에 대사헌,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다가 인조 6년(1628) 70세로 영의정에 올랐다.

78세로 세상을 떠나며 유언으로 조정에 시호를 청하지 말고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현종 4년(1663) 충간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987년 신도비도 세워졌다. 무덤 앞의 묘비는 김상헌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썼다. 신도비 내용 중 약천 남구만이 추탄을 칭송한 글이 있다. 인조 때 조정 인물로는 절의로는 해창 윤방, 국가를 중흥한 인물로는 북저 김류, 덕망으로서는 상촌 신흠, 문장으로는 월사 이정구가 있는데 추탄 오공은 이 모든 것을 가진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이곳 산세는 한남정맥 석성산(471.2m)과 할미산성에서 북쪽으로 뻗은 맥에서 비롯된다. 능원천과 오산천 사이의 맥이 가지를 뻗어 오산천을 앞두고 보국을 형성하였다. 오윤겸 묘를 가운데에 두고 좌측과 우측의 수많은 능선들이 청룡백호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능선들마다 묘들이 있는데 혈은 오윤겸 묘 하나뿐이다. 유혈이지만 내청룡과 배백호가 가까이 있어 오목한 가운데 있어 와혈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혈로는 보기 어렵다. 묘 뒤 입수룡의 변화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또 내청룡과 내백호 끝이 서로 관쇄하지 못해 앞이 열려 있다. 양쪽에서 흘러나온 물이 앞에서 합수하긴 해도 곧장 나가기 때문에 혈의 역량이 감소한다. 나머지 묘들은 오윤겸 묘를 보호하는 청룡 백호 자락에 있다. 정룡이 아니고 보룡이기 때문에 혈로 보기 어렵다. 특히 할아버지 오경민과 아버지 오희문 묘는 높은 능선 위에 있는 과룡처다. 과룡처는 기가 흘러가므로 좋은 자리로 볼 수 없다.

오윤겸 후손들은 오윤겸 묘의 발복 때문에 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윤겸은 어디서 발복이 되었을까? 필자는 외가라고 생각한다. 포은 정몽주 묘 옆에 있는 저헌 이석형 묘가 조선팔대명당 중의 하나다. 이후 연안이씨들은 조선3대명문가의 하나로 꼽을 만큼 번창했다. 동기감응은 아들에게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딸들에게도 영향을 주므로 외손들이 잘 되는 것이다. 오윤겸 어머니가 이석형의 증손녀이니 가능성이 충분하다.

인구가 감소하는 시대다. 인구의 양적 증가에 힘써야겠지만 질적인 문제도 중요하다. 좋은 인재를 생산하는데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풍수도 그중 하나가 될 것이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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