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가부도의 날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흥행하였다. 필자는 이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제목을 보는 순간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1960대초 경제발전을 시작한 우리나라는 이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놀라운 성장을 이룩하였다. 특히 1980년대 중반에는 소위 3저 효과에 힘입어 경상수지가 사상 처음 흑자를 기록하는 등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 유지되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우리 정부는 세계화를 선언하고 경제 개방과 외환부문의 자유화를 적극 추진하였다. 대기업들은 밖으로는 해외 진출을 확대하는 가운데 안으로는 문어발식 확장을 지속하였다. 이에 필요한 자금은 대부분 부채로 조달하였는데 특히 외화부채가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1996년 반도체 가격 하락으로 경상수지가 230억달러의 대규모 적자를 보이면서 위기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97년 1/4분기에는 대기업인 한보철강의 부도로 외환시장에서 불안이 나타났으나 다행히 2/4분기 들어 진정되었다. 그러나 7월초 태국바트화 등 동남아 통화들이 평가절하되고 기아자동차의 부도 등으로 시장불안이 심화되었다. 10월 들어서는 홍콩 주식시장 폭락, 우리나라 국가신용등급의 강등 등으로 위기가 고조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외화부채였다. 기업들의 외화조달은 주로 국내은행들의 해외차입에 의존하였는데 특히 3개월 이내의 단기 차입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위기가 심화되면서 이에 대한 차환이 불가능해지고 외환보유액으로 이를 지원하였으나 결국 이마저도 바닥을 보임에 따라 1997년 11월 우리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게에 이르렀다.

소위 IMF사태는 불리는 외환위기 직후 우리 경제는 심각한 불안을 보이는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IMF의 처방에 따라 살인적인 고금리가 유지되는 가운데 환율은 2,000원에 육박하는 등 극심한 변동을 보였으며 많은 해외 주재원과 유학생이 조기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는 큰 폭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였고 소비자물가는 10% 가까이 급등하였다. 또한 대우를 비롯한 많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망하면서 실업자가 속출하였다. 노숙자도 이 때 생겨난 것이다. 금융기관도 무사하지 못했다. 종금사를 비롯한 많은 금융기관이 문을 닫았으며 은행 간의 합병도 이어졌다.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이어졌다. 금 모으기 운동은 세계를 놀라게 한 뉴스였다. 필자가 듣기에 한 독일인은 뉴스를 보고 저 나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우리나라에 투자하여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정부, 기업, 가계, 금융기관들이 모두 처절한 자구 노력을 이어갔으며 이에 힘입어 경상수지가 흑자로 전환되고 외환보유액도 확충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나라는 IMF 차입자금을 예정보다 조기에 상환하면서 IMF를 졸업하였다.

IMF사태 이후 우리 경제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우선 경제체질이 개선되었다. 외환위기 직전 400%에 이르던 제조업 기업의 부채비율이 100% 이내로 낮아졌으며 기업의 리스크 관리도 보다 철저해졌다. 외환부문의 경우 대외채권이 대외채무보다 많은 순채권국으로 전환하였으며 외화부채중 단기외채의 비중도 획기적으로 감소하였다. 또한 경상수지가 흑자를 지속하는 가운데 외환보유액도 4,000억달러를 초과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대기업들의 외주와 하청 확대로 많은 비정규직이 양산되었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는 1990년대에 비해 훨씬 크게 벌어졌다. 또한 반도체 등 특정 산업과 특정 대기업에 대한 경제의존이 높아졌으며 경제개방 확대로 대외의존도 심화되었다. 이외 소득 불평등이 확대되고 계층간, 세대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경제의 활력이 감소하고 있으며 기업 대신 가계의 부채가 위험요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향후 IMF사태와 같은 외환위기가 다시 올 수 있을까? 기업의 체질 개선과 외환부문의 건전성으로 볼 때 확률은 크지 않다. 그러나 경제위기는 항상 똑같은 경로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

서명국 한국은행 경기본부 기획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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