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영남루는 경남 밀양시 내일동 36-1(영남루1길 16-11) 밀양강가 절벽에 위치한다. 조선시대 밀양도호부 객사에 속했던 건물로 연회를 열거나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로 꼽힐 만큼 풍경이 뛰어나다. 누각이란 지표보다 높게 바닥을 띄워 마루를 깔고,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문과 벽이 없는 건물을 말한다. 정자와 비슷하나 규모에서 차이가 난다. 대체로 누각은 공적인 연회와 행사를 펼치는 곳으로 크고 웅장하다. 또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지대에 위치한다. 이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권력자들이 이용했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정자는 사적인 공간으로 규모가 작다. 대개 자연을 벗 삼아 즐길 수 있는 산속이나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벼슬에서 물러났거나 세상을 멀리하려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누각이 살아있는 권력이라면 정자는 권력에서 벗어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개인 주택에서도 ‘운조루’처럼 누각이 있는 집도 있다. 보통은 사랑채에 붙어있는데 한두 칸을 높이 띄우거나 튀어나오게 하였다. 그 집에서 가장 권위적인 공간으로 집 안팎의 풍경을 내다볼 수 있다.

영남루는 신라 경덕왕 때 세워진 영남사라는 절이 있다가 폐산된 자리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 밀양군수 김주가 신축하여 절 이름을 따서 이름 하였다. 조선 세조 때 규모를 크게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병화로 불타버렸고, 인조 때 다시 중건하였으나 순조 때 실화로 불타 버렸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헌종 10년(1844) 밀양부사 이인재가 새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좌우로는 능파당과 침류각이라는 익루가 있는데 동쪽 능파당은 복도 형식의 헌랑, 서쪽 침류각은 지형의 높이차로 계단식으로 층을 이룬 월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주택·관아·객사·향교 등 주거·업무·교육 장소는 경관보다 풍수지리를 우선하여 입지를 정한다. 그러나 누각과 정자는 풍수보다는 경관을 우선한다. 그런데 영남루는 경관도 뛰어나지만 풍수도 좋은 곳이다. 이곳의 산세는 경북 영천의 낙동정맥 사룡산(685.5m)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나와 대구 비슬산(1.083.4m)까지 이어진 후 다시 남쪽으로 뻗어내려 온 비슬지맥에서 비롯된다. 밀양의 태조산인 화악산(932.1m)에서 중조산인 옥교산(539.3m)을 거쳐 소조산인 추화산(242.4m)을 세웠다. 그리고 밀양강가로 내려와 아동산(88,1m)을 만드는데 이곳의 현무봉이다.

관아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아동산은 거북의 등처럼 생겼다. 서쪽으로 박시춘 옛집 아래 잘록한 고개는 목이다. 영남루와 천진궁이 있는 볼록한 땅은 혈처로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다. 산맥의 목을 잘록하게 묶으면 끝에 기가 모여 혈을 맺는 방법을 풍수에서는 결인속기법이라고 한다. 산맥인 용이 기를 모으는 방법에는 결인속기법 외에 좌우선룡법, 태식잉육법이 있다. 이 세 가지 중 하나 이상이 있어야 혈로 인정한다. 이곳은 결인속기법이 분명하므로 풍수가 좋은 터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점은 주변 산세가 아름답기는 해도 이곳을 향하고 있지는 않다. 물 또한 밀양강이 이곳을 등지고 흘러 반배하고 있다. 풍수지리 고전에 ‘용혈위주 사수차지(龍穴爲主 砂水次之)’라는 말이 있다. 용과 혈이 우선이고 사와 수는 그 다음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용혈이 좋으면 주변 산세와 수세는 좀 부족해도 쓸 수 있는데 밀양정이 그런 자리다. 형국으로는 신령스런 거북이가 산에서 내려와 물로 들어가려고 하는 영구하산형으로 보인다.

영남루 맞은편에는 단군의 영정과 함께 역대 8왕조(부여·신라·고구려·백제·가야·발해·고려·조선)의 시조 위패를 모신 천진궁이 있다. 본래 객사인 밀주관이 있었던 자리다. 그런데 일제는 우리 역사의 정통성을 말살하려고 위패를 땅에 묻고 이 건물을 감옥으로 사용하였다. 앞마당에는 국화모양의 꽃돌이 신비롭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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