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새로 건설되는 공동주택 단지 이름을 보고 지인들끼리 실소를 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영어 단어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저렇게 지어야 나이 드신 노인들이 자식들의 집을 찾지 못한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이름 짓기는 피를 흘리며 독립투쟁을 한 우리 선조들에 대한 배신이다. 얼마전 말모이란 영화가 나오기도 하였지만 우리 선조들은 일제강점기 우리의 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던 시절에도 끊임없이 우리 말과 글을 지켜왔다. 일제는 우리 말을 사용하면 감옥에 보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식민통치정책을 강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우리 말과 글을 지켰는데, 이제 그 역사를 망각하고 온 나라가 영어로 된 알 수 없는 이름으로 공동주택을 도배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요즘 길거리에 나가면 영어로 씌어지지 않은 옷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다 못해 지성인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대학에서도 학생들의 대부분이 아무런 생각없이 영어로 도배되어 있는 옷을 입고 다닌다. 거기에다 한 술 더떠서 우리나라에 수입된 외국의 유명 의류는 아예 윗도리에 미국 성조기를 대문짝만하게 새겨 놓았고, 또 어떤 수입 의류는 영국 국기를 새겨 놓기도 하였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이처럼 영어 문양으로 가득한 옷을 입고 다니는 시대가 되었으니 나라 전체의 공동 주택 거주자들이 외국어 특히 영어와 불어로 이름을 지어달라고 청원하는 것이 비정상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까지 간 것에 대해서는 속이 상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우리나라는 조선의 건국부터 강대국에 대한 숭배가 존재했다. 조선의 건국이념이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큰 나라는 높이 받들고 우리 보다 국력이 약한 나라와는 사귄다라는 이 말은 현실 정치에서는 꽤 유용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무모하게 능력도 안되면서 강대국과 맞서려고 하다가 나라도 망하고 백성들도 다치는 것보다는 오히려 현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그것에 맞게 대처하는 것이 현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기죽고 들어가는 것은 거시적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그리 옳다고 할 수 없다. 어쨌든 이러한 사대교린으로 시작된 소극적 입장이 민족의 자주성을 떨어뜨리고 마침내 일제의 식민지배라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백성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부단히도 싸웠다. 물론 강대국에 아부하여 호의호식한 이들도 상당수였지만 그래도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북풍한설에 풍잔노숙하면서 투쟁한 이들이 산하에 가득했다. 이들의 노력이 결국 나라를 되찾게 만든 것이다. 이들은 그 어려운 시기에도 우리의 역사를 공부하고 우리 말과 글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비록 해방 이후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또 다른 서양 강대국인 미국에 의해 민족의 정신과 기운이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식민시기 독립투쟁은 반만년 역사에 금자탑으로 남을 수 있다. 이렇게 어렵게 나라의 말과 역사를 되찾은 우리가 오늘날 우리의 정체성을 버리고 서양의 이름으로 우리 마을의 이름을 짓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온 나라의 땅과 백성들이 겉은 한민족이지만 이미 서양인이 되었다. 더불어 영어로 된 에듀타운, 에듀플러스빌리지타운이라는 이름이 들어간다고 정말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뛰어난 학업 성적을 이루는 것일까? 학업 성적이 모두 뛰어나다고 과연 그 아이들의 인생이 훌륭해지는 것일까? 모르겠다. 민족의 정신도 사라지고 공동체 문화의식도 사라진 마당에 나 혼자 좋은 대학가고 나혼자 돈 많이 버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값진 인생을 살아가는 것일까!

마을의 이름을 영어로 짓는 것이 추세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마을이 만들어지지 이전까지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던 조상들의 작은 역사를 잃어버리고 마천루의 빌딩과 서양의 온갖 이름들로 도배를 한다면 우리는 훗날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사회의 슬픈 모습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그저 기념일을 지내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다신 민족의 말과 글을 되찾는 인문혁명을 해야 할 것이다.

김준혁 한신대 교수, 한국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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