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생각하면 할수록 자랑스럽다. 어떻게 나라 이름을 그렇게 지을 수 있었을까! 민(民)이 세운 나라 대한! 얼마나 자랑스럽고 떳떳한가! 황족도 아니요 귀족도 아닌 민이 세운 나라이니 민의 나라일 수밖에 없다. 그 민은 실로 독립운동으로부터 왔다.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앞장선 것이 힘이 되어 민의 나라를 얻게 된 것이다. 숱한 열사와 의사와 의병들의 힘이 모여 나라를 세웠으니 당연히 국호가 대한민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 사이 황족과 귀족들은 무엇을 했는지 알아야한다. 어느 시대 한번 지도층에 있던 사람들이 국난극복을 위해 앞장선 일이 있었던가 해서다. 임진왜란 때나 병자호란 때나 일제의 침탈 때에도 지도층이 앞장 서 나라를 구한 적은 없었다. 지도층은 언제나 도망가기에 바빴다.

1592년 4월에 20만 왜군이 쳐들어와 부산에 상륙한지 18일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6월에는 평양과 함경도까지 진격하였다는 임진왜란 당시의 사정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무런 대비 없이 당한 전란이라 하더라도 왜군의 진격이 상상이상으로 순조롭지 않고서는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왜군의 입장으로는 적어도 엄청난 전투를 거친 뒤에야 진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각오를 단단히 했겠지만 발길이 닿는 곳마다 텅빈 마을이요 주인없는 성채였다. “왜놈들이 쳐들어 온다!”는 한마디에 지역의 행정이나 병사 책임자들이 모두 도망을 가버렸던 것이다. 부산성이 함락되고 동래에 적군이 들어왔다는 소문에 그만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각, 양산 군수 조영규, 밀양부사 박진 같은 책임자들이 도망쳐 버렸으니 왜군들은 허허벌판을 휘졌듯이 서울로 진격했던 것이다. 다만 유일하게 당시의 명장으로 소문난 신립장군만이 서울의 관문이나 다름없는 충주의 탄금대에서 일전을 겨루었을 따름이었다(신립장군은 여기서 순국했다)..

유일하게 믿었던 신립장군마저 중과부적으로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정신이 아득해 진 상태에서 피란 갈 궁리부터 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은 왜군이 서울근교에 왔다는 소식과 함께 4월 29일 새벽 2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수십명의 대신들과 수행원들을 데리고 대궐 뒷문을 통해 말을 타고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재촉했다. 얼마나 급했으면 왕비는 가마꾼이 없어 가마도 타지 못한 채 걸어서 대궐을 나갔을까! 왕이 대궐을 빠져 달아났다는 소문이 나자 시민들은 분노와 허탈감으로 불 꺼진 대궐을 쳐들어가 마구잡이로 난동을 부렸다.

서울을 점령한 왜군들은 오히려 조선백성들보다도 더 놀라워했다. 그동안 일본 내전에서 보아왔던 모양과는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전쟁에서 패하면 성주(城主)가 자결을 하던가 항복을 하는데 이 나 라에서는 왕이라는 사람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을 쳤으니 말이다. 선조의 피난 행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개성을 거쳐 평양에 도착한 왕은 왜군이 개성을 함락시켰다는 보고에 그만 혼비백산하여 서둘러 다시 의주로 피난했고 이어 평양이 함락되자 백성들은 아랑곳 없이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요동의 지방관에게 망명의 공문서를 띄우기도 했다.

어디 그 뿐인가! 명과 일본간의 화의로 잠시 중단 되었던 전쟁이 화의가 깨지고 다시 전운이 감돌자 선조는 전쟁에 대한 계책보다는 도망갈 핑계를 찾는 일부터 서둘렀다. 궁리 끝에 내세운 핑계가 옛날에 “해주산에 묻어둔 아이의 태(胎)를 보러 가야겠다”는 황당한 것이었다. 해주가 북쪽으로 도망가기에 편리한 지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본 그 예하의 신하들은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그런 핑계대지 말고 도망가고 싶으면 차라리 강화로 가는 것이 어떠냐는 고언도 서슴치 않았다는 기록을 본다.

대한제국이 멸망해 가는 과정을 보면 더욱 가관이다. 경위야 어떻든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죽을 때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억울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한말(韓末)의 선비들은 한 것같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같은 이는 자결로 항의했고 수도 없는 선비들이 을사 5적을 척살하라는 상소를 당당하게 그리고 쉼없이 고종황제에게 올렸다. 그러면서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임금이 자결하라는 상소를 서슴치 않았다.

홍주의 의병 이설(李楔)같은 이가 그러했고 헤이그의 특사로 갔던 이상설(李相卨)도 그러했고 최익현(崔益鉉)도 그랬다. .

그러나 고종황제는 이들의 상소에 대해 일언반구 해답을 준적이 없다.

외교권이 빼앗기고 일제의 보호국으로 나라가 통째로 없어지는 판인데도 황제는 일제의 강요에 반대 한번 하지 못하고 “협의해서 처리하라!”라는 말로 모든 책임을 대신들에게 떠넘기고 말았다.

을사5적은 승승장구하면서 한일합방에 공을 세우기에 바쁜 사이에 민초들은 스스로 의병이 되어 전국각지에서 봉기하여 일제와 치열하게 싸웠다.

원용석 이강년 신돌석 홍범도 같은 이들이 그 선봉장이 되었고 5~6만명의 의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고종황제라는 사람은 마지못해 비밀리에 의병들을 독려 하거나 1907년 6월에 열리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3명의 특사를 파견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일로 하여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 당하고 순종이 즉위하는 일제(日帝)의 사기극이 연출되었다.

이때부터 일제는 일사천리로 합방조약체결의 길로 매진하였다. 1907년에는 소위 정미7조약이라는 것을 만들어 모든 내정을 일본 통감의 지도를 받도록 하고 사법권도 일제의 손으로 넘기도록 하였다. 말하자면 일본 통감이 외교권과 사법권은 물론 내정전체에 대한 권한을 갖도록 하는 조약이었다. 이와 함께 일제는 각서라는 형식의 문서를 통해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로써 합방조약이 아니더라도 조선의 주권은 숨이 끊어져 버린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순종이 즉위한 이후 합방조약 때까지 한 일을 보면 참으로 부끄럽고 부끄럽다. 시대의 영웅 안중근(安重根)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대한(對韓) 침략의 괴수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죽이자 순종은 이등박문이 죽은 지 하루만인 27일에 통감부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가 조문하고 또 그 이튿날에는 이등박문에게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 얼마나 망령된 일인가! 뿐만 아니라 이등박문 조문 사절단까지를 보냈다. 이완용을 정부대표로 삼아 순종 자신의 시종원경 윤덕영(尹德榮)을, 고종은 승녕부 총관 조면희를, 시민대표로 한성 부민회장 유길준(兪吉濬)을 대표단으로 꾸려 27일 일본 군함을 타고 대련으로 향하도록 했다. 이등박문의 유해가 일본으로 가기 위해 대련에 와 있어서였다. 이들 대표단은 28일 대련에 도착하였으나 일본 측의 거부로 상륙도 하지 못한채 함상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등박문의 죽음에 항의하는 일본인들의 행패에 조문사절단이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이등박문의 유해를 실은 배가 일본으로 가기 위해 대련항을 떠나자 그제서야 항구밖에서 배위에 올라 이등박문의 시체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갈수록 가관이었던 것은 29일에 조문을 마치고 돌아온 이완용은 곧바로 내각의 명령으로 3일 동안 일체의 가무음곡을 금지시킴과 동시에 11월 4일 장충단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1만여명의 추도객을 집결시키기도 했다. 같은 날 일본 히비야 공원에서 거행되는 장례식에는 황실대표로 궁내부대신 민병석(閔丙奭)과 정부 대표로 농상공부대신인 조중응(趙重應)을 파견하여 조문하고 그 가족에게 조위금도 10만원을 전달하였다고 한다. 이 무슨 해괴한 짓거리였던가 말이다.

허수아비에 불과 했던 순종은 한일합방조약을 맺는 날인 1910년 8월 22일 오후 1시. 창덕궁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이 끝난 것처럼 말했다.

“부왕폐하로부터 대임을 물려받아 4년여에 이르렀으나 백성과 나라의 곤궁한 형편을 구하지 못하고 이제 1천 5백만 인민의 화가 눈앞에 닥쳐왔음을 보게 되었다. 이에 짐은 저들과 같은 백성을 차라리 선진 유덕한 일본천황에게 위탁하려 하는데 여러 신하 가운데 만약 인민을 구제할 방도가 있다면 숨김없이 말해 보라.” 이때 총리대신인 이완용은 “하교에 대해 드릴 말씀이 없나이다. 다만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를 자책하여 황공할 뿐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한시준).

그런데 이날 맺은 합방조약이라는 것이 참으로 맹랑하다. 전체 8개조항으로 되어있으나 그동안 조선의 외교권이나 군대 경찰권과 사법권까지 몽땅 일제가 가져 간 뒤였기에 통치권을 완전차 영구히 일본 황제에게 넘긴다는 조항을 빼면 한국 황실과 친일대신들에 대한 예우에 대한 조항이 전부다. 그리고 이 조항대로 조약을 공포하는 8월 29일에는 <조선귀족령>을 동시에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귀족이라는 직제가 새로이 생기면서 나라를 팔아먹는데 공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작위를 받음과 동시에 조선 귀족이 되어 일본 천황제하의 신분제도로 편입되어 자자손손이 부와 특권을 누리도록 보장받게 되었다.

순종은 제국이 망한 날로 공포되는 바로 이날(8월 29일) 즉 대한제국 최후의 날에도 철없이 내각의 간부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었다. 내각 간부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았던지 이완용의 처에서부터 상궁에 이르기 까지 무더기로 훈장을 수여했다. 망한 나라의 훈장이 무슨 영광을 가져온다고 주었는지 모를 일이다. 황제가 뜻도 모르고 훈장을 수여하고 있을 즈음 “미치광이들이 들끓는 도깨비나라”에 무슨 벼슬이냐는 생각으로 초야에 묻혀 있던 선비 황현(黃玹)은 망국의 소식을 듣고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린다. 무궁화 우리강산이 망했구나”하는 절명시를 남기면서 자결했고 수도 없는 우국지사들이 그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망국에 책임지는 왕족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일제가 베푸는 시혜에 안주하기 바빴다. 황실에 대한 예우가 이날로부터 바뀌었던 것이다. 순종은 <창덕궁 이왕 전하>,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 전하> 황태자는 <왕세자 이은 전하>로 명명되었다. 이왕직관제는 일본 궁내성이 관장하도록 하면서 직원은 198명, 1년 예산은 150만원으로 책정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일본의 신분제로 편입되었다. 고종도 <이태왕 전하>의 신분으로 1919년 1월까지 살았고 순종은 1926년까지 <이왕 전하>로 살았다(권영민).

그런 연유였던지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영친왕 같은 이는 “아무쪼록 지금까지와 마찬가지 대우를 해줄 수 없느냐?”고 내각에 애걸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해방 이후 미국에 유학 가있는 아들 이구의 대학졸업식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 귀화 하여 일본 여권을 받기까지 하였다. 이때 그의 귀화의 뜻을 접한 일본궁내청이 오히려 “아무리 아들이 보고 싶어도 귀화문제만큼은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만류까지 하였다는 얘기도 있다(조선일보),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은 어느 날의 기사에서 “~~왜 광무(고종)와 융휘(순종)는 죽음으로써 조상의~뒤를 따르지 못하고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누명을 구차히 보존하였는가”라고 질타했다. 한말의 지도층들이 일본직제의 귀족으로 행세하면서 부귀를 누릴 적에 이 땅의 민초들은 해외에 임시정부를 만들어 재산과 생명과 가족을 바쳐가면서 나라 되찾는 데에 전심전력하였다는 사실을 한번만이라도 생각하였다면 역사가 얼마나 더 자랑스러운 역사가 될 수 있었을까! 아쉽고 또 아쉽고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오늘의 지도층들도 한번쯤 되돌아 볼 역사 아니던가!

김중위 전 환경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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