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드 환한 불빛이 어둠을 가르며 새벽을 깨우는 시간, 한 여인의 행복한 얼굴이 떠오른다. 늘 밝은 모습의 H는 가끔 나의 사무실이나 운치 있는 카페에서 나와 차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먼 산위에 머물던 잔설도 사라지고 거리 여인들의 옷차림도 가벼워진 봄빛이 완연한 어느 날, 연둣빛 코트를 입은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와 나는 분위기 있는 찻집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급속히 변화하는 세계화·정보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일상에 화제가 옮겨졌다. 이러한 변화는 물건이 이동하던 시대에서 사람이 이동하는 시대로 도래하며 다문화시대가 열린 것이다. 나와 그녀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척도가 많은 공감을 이뤘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다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실정이다. 다인종 다문화 사회는 이제 선택이 아닌 세계 모든 나라가 겪는 현상이며,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수의 급증은 미래 한국 다문화사회의 모습을 예견해 준다. 따라서 한국사회는 문화적 다양성에서 기인하는 차이를 어떤 시각에서 보고 대처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이 같은 다문화 가족들과 오랜 세월 함께 하다 보니 그들의 애환에 때로 마음 저려 올 때가 많지만 가끔은 H와 같은 좋은 모습에는 가슴 가득 기쁨이 전해 오기도 한다.

H는 자신의 모국에 사업차 와 있던 지금의 남편과 만나 꿈같던 연애 시절을 거쳐 결혼을 했다. 자기의 모국에서 두 아이를 낳은 후, 3월 어느 날 남편과 함께 대한민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녀는 지금도 3월이면 처음 대한민국 땅을 밟았던 때의 부푼 꿈을 꾸며 행복에 젖는다고 했다. 그녀는 결혼 전, 대학을 졸업하고 그녀가 원하던 회사에 들어가 희망 찬 미래를 그리던 풋풋한 처녀 시절, 잘 생긴 외모와 경제적 여유까지 갖춘 청년 실업가인 남편을 만났다고 했다. 처음 만났던 날의 멋진 남편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깊은 사랑에 빠진 그들 부부는 두 자녀와 화사한 봄꽃의 환영을 받으며 대한민국에 입국했고, 그 날의 강한 인상은 그녀의 한국에서의 삶을 힘차게 비상 시킨 원동력이 되었다고 했다. 주위로부터 원앙 부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이좋은 이들 부부는 S시에 안락한 아파트에서 가정을 꾸몄다. 남편은 여전히 사업을 잘 하고 그녀는 매년 친정을 방문하고 지인과 함께 동호회 활동으로 즐거운 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남편의 나라 대한민국이 최고라고 말하며, 간간 고생하는 여성결혼이민자들을 보면 미음이 아프다고 했다.

아직 매서운 추위가 떠나지 못하는 3월, 그녀는 새로운 꿈을 설계해 보았다고 한다. 자신의 아이들이 조금만 더 크면 자신과 같은 여성결혼이민자들을 위해 일하고 싶은데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진지하게 물어 왔다. 자신의 삶을 안정된 궤도에 올려놓고 이제 남을 돕고자 마음먹은 그녀가 그지없이 선해보였다. 자신보다 힘들게 살아가는 이주여성들을 위해 작지만 힘을 보태 일하고 싶다는 어여쁜 마음의 그녀! 그녀의 이 같은 말은 아직도 동면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는 산야를 온통 꽃으로 채우며오는 봄바람처럼 싱그럽고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이 같이 올곧은 포부를 말해올 때, 미국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이주여성들이 미국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고통 받는 다른 이주여성들을 돕던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생각나서 나는 그 이야기를 해주었고, 나의 오랜 세월 이주여성들과의 만남에서 꼭 하고 싶었던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대화를 하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우리는 따스한 눈길을 서로 나누며 오래오래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그토록 소중한 일을 할 날을 기대하며, 행복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삶에 봄의 새싹들로 피어나도록 굳건한 사랑의 응원을 보낸다.

서종남 한국다문화교육상담센터 센터장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