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과 규범을 말하는 것이 유치해지고, 철학을 논하는 것이 외면되는 세상을 넘어 ‘문송합니다’와 ‘인구론’으로 이어져 인문학도로서 밥숟가락마저 놓을 수밖에 없어졌다. 국문학과, 문예창작, 사학, 철학 그저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싶을 뿐이었지만, 그 길을 간다는 것은 결코 고고하지도 배부르지도 않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에 대해 김민섭(37) 작가 본인은 담담한 고백이라 했지만 자신을 온전히 바라본 어쩌면 이 땅 위 인문학도들에게 바치는 유일한 찬가다.



-언제부터 국문학도를 꿈꿨나요.
“저는 국문과의 입결이 의대보다 높은 줄 고3이 돼서야 알게 됐어요. 시험 볼 때도 ‘국어’를 가장 먼저 보잖아요. 그래서 국어가 가장 중요한 과목인 줄 알았어요.(웃음) 게다가 당시 교장선생님이 입시보다는 전인교육을 중시하던 분이라 ‘야자’도 고3 때나 돼서 처음 해봤습니다. 당시에도 글을 쓰는 것이 좋고, 국어가 가장 좋았습니다. 고2 때 당시 천리안에 올렸던 글을 보고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출판약을 한 뒤 여름방학 내내 글만 써서 출판사에 넘겼습니다. 어느 날 담임이 저를 불렀습니다. ‘교사 생활 20년 동안 평균 20점이 떨어진 것은 네가 처음’이라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죠. 방학 내내 책을 썼다고 하니 만류하셨죠. 나중에 출판이 되니 자신의 격려 덕분이라고 말하시더군요.(웃음) 이때 출판된 책 제목은 ‘831019 여비’인데 세기말 감성으로 지어졌죠. 내용은 고등학생의 시시콜콜한 일상이 담긴 에세이입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삶을 소개해 주시죠.
“좋아하는 국문학을 할 수 있기에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학부를 3학년으로 조기졸업하고 2008년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학위를 가지고 먹고사는 일은 대학의 연구자가 되는 것 말고는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죠. 거의 모든 대학원생들의 목표이자 꿈이 그렇듯. 저 역시 열심히 공부해서 논문을 빨리 쓰고, 좋은 성과를 내서 이른 나이에 교수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현실은 꿈과는 다르죠. 대학에 남아있는 방법은 단 두 가지. 비정규직 시간강사로 남느냐 정규직 교수로 남느냐 뿐입니다. 이마저도 길이 험합니다. 절반의 사람만이 시간강사까지 도달할 수 있죠. 박사학위를 받아야 한 사람의 연구자로 시간강사의 공채를 넣을 수 있는 자격이 생기니까요. 논문을 쓰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논문을 만들기까지의 그 모든 과정을 어떻게 버티느냐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열정과 비용, 시간을 소모해 논문을 작성했지만 이런 학술적인 성과를 싣는 데도 돈이 듭니다. 학술지에 게재하기 위해서는 가입비, 연회비, 원고지, 게재비, 심사비를 입금해야 합니다. 연구하는 데 드는 비용, 자료비용, 대학의 등록금, 10만~100만 원 수준의 연구등록비까지 많은 비용이 소요됩니다. 논문을 쓰는 것이 힘들다는 것보다 오히려 이 지난한 시간과 자괴감을 버텨내는 것이 더 힘듭니다. 제가 아는 대학원생은 대부분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아르바이트로 생계와 학비와 논문비용을 지불하며 버틴다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시간강사를 하면서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했다고요.
“결혼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학자금 대출을 받고, 시간강의를 하면 카드가 밀리고 용돈을 버는 수준이지만 유지는 되는 상황이었요. 하지만 아이가 생기면서 생계비가 늘어나고 무엇보다 건강보험이 필요했습니다. 시간강사는 4대보험이 되지 않거든요. 그래서 많은 선배들이 부모님의 ‘피부양자’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결혼을 해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혼인신고를 하면 부양자가 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때는 모든 상황이 그랬습니다. 시간강사 수입으로 아내에게 80만 원을 생활비로 가져다 주는 상황이었는데 지역가입보험료는 10만 원이 넘었습니다. 당시 저에게 필요한 것은 한 달에 50만 원의 추가수입과 건강보험이었습니다. 맥도날드에서는 월, 수, 금요일 또는 주말 구인광고를 보고나서 다음 날부터 물류상하차 일을 시작했습니다. 마침 월, 수, 금요일에는 오전 강의가 없었습니다. 또 건강보험도 보전해주고 여러 사회적 보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월수입 130만 원으로 세 식구가 어떻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끼니는 당연히 학생식당, 맥도날드에서 해결했죠.(웃음) 한 번은 아내가 보건소에 갔더니 한 달에 달걀과 감자, 쌀을 두 번씩 보내주는 영양플러스라는 제도를 안내받았습니다. 제도의 혜택을 받으려면 소득증명을 건강보험으로 하는데 당시 납부금액이 1만4천500원이었습니다. 납부금액을 본 뒤 보건소직원이 ‘0이 하나 빠진 것 아니냐, 이정도면 지역에서 가장 적게 내는 편’이라고 전해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마 지역가입자로 10만 원을 납부하고 대학강사만 했다면 이런 보장도 못 받았을 겁니다. 맥도날드 알바가 우리 가족 생계에는 큰 도움이 됐습니다. 새벽부터 점심까지는 알바를 하고, 점심부터 저녁까지는 강의를, 저녁부터 새벽까지는 논문을 준비했습니다. 그때는 치킨 한 마리 시켜 먹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냥 평균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자로서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의 삶이고, 본가에서 지원을 받아서 성과를 내면 좋겠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죠.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결혼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진 것 없이 결혼해서 책도 쓰고 그랬냐?’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대학을 떠나온 4년 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지금은 책도 쓰고, 출판 기획도 하고, 대리기사도 하고, 육아도 하면서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대단히 즐거운 나날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대학을 그만둔 것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대학에 있을 때 어떤 강사가 연구실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행복도 조사를 했는데 그때 행복지수가 0점 나왔습니다. 저는 그때 ‘내일이 오늘보다 행복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강의실과 연구실이 있고, 그 속에서만 지도교수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지난한 시간을 이어갔죠. 하지만 대학 밖에, 사회관계 속에도 지도교수와 연구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박사논문 인준을 받지 않아도 대학 밖에서 더 많은 공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이후로 출간된 ‘대리사회’와 ‘훈의 시대’ 같은 책들은 말하자면 저의 논문인 셈이죠. 대학을 그만둔 것보다는 옮긴 것이죠.”

-대학이 그리운 적은 없었나요.
“대학에 있었던 시간들 역시 저에게 소중한 시간입니다. 학위논문을 포함해 5편의 논문들과 그 논문을 쓴 시간이 있었기에 제가 대학 밖에 나와서 글을 쓸 수 있었죠. 작가라고 불러주시는데 저는 작가와 연구자의 중간 포지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간에서 쓸 수 있는 글이 있습니다. 분명 대학의 시간이 없었다면 가질 수 없는 능력입니다. 대학에서 가장 행복한 기억은 강의실에 있습니다. 시간강사로 있었던 6학기 동안 글쓰기 강의 신입생들을 만나는 일이 가장 그립습니다. 5학기 동안 최우수 강사 상을 받고, 점수가 행복을 담보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강사 평가에서 4.8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에게 배우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학생들에게 배워야지 하고 강의에 들어가면 학생들도 저도 만족하는 상황이 계속됐습니다. 16주를 지켜보면서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퍽이나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이 모든 시간이 작가 김민섭 속에 있습니다. 강의했던 시간들만큼은 돌아간다면 돌아가고 싶습니다.”

-책에 대해 당시 반응이 궁금한데요.
“거의 모든 지방대에서 이런 공감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느날 회식자리에서 선배가 ‘내 얘기 같아서 울 것 같았다’고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이디 309동 1201호는 당시 살던 원룸입니다. 드러나지 않을 새로운 아이디를 필요했습니다. 나름 숨기려고 장치를 넣긴 했는데 큰 사건들은 같이 겪은 것이니까 결국에는 밝혀졌습니다. 밝혀지기 전까지는 대한민국 지방대 인문학도들이 서로를 의심(?)하는 상황이 됐었죠.(웃음) 이 책으로 인해 없거나 나쁘거나 한 사람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태도는 이해가 갑니다. 같은 상황이라면 거기에 저 역시 동참을 했을 겁니다. 대학을 떠나게 된 것은 쫓겨난 것도, 박차고 나온 것도 둘 다 사실은 아닙니다. 책의 저자가 저로 밝혀지고 저는 교수나, 교직원들이 찾아올 줄 알았습니다. 대학의 구조에서 그런 것이 이해가 됐고 사정을 말하고 버텨나가려고 했습니다. 개인을 둘러싼 구조와 시스템에 대해서 바꾸는 노력을 하고 싶다고 생각을 했고, 제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을 하면서 대학에서 버텨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찾아온 것은 제 동료들이었습니다. 그때 여기서 더는 평범하게 연구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 동료들과는 교류가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때는 교수, 선배, 교직원들에게 대해 원망이 있었지만 지금은 원망이 거의 모두 사라졌다는 겁니다. 누구라도 대한민국 대학이라는 구조에서 나약해지고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만약 제가 같은 자리에 있었더라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강사법 시행을 놓고 대학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요.
“사실 이제는 당사자가 아니라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대학처럼 변화가 없는 곳은 없을 것이고 그 공간이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강사법’은 이전부터 말이 많았던 법입니다. 시행이 된다 하더라도 말이 많아질 거라 생각됩니다. 지금의 대학은 어떤 방식으로든 비용을 줄이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모든 기업이라면 당연한 방법이고 대학은 기업이 되고자 노력을 해왔습니다. 어쩌면 대학이 완전한 기업이라면 오히려 이런 일이 없었을 겁니다. 저는 강사법이 시행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강사를 줄이고, 수업을 줄이고, 기존 정교수들에게 강의를 늘리고, 인터넷강의를 늘리고, 졸업학점을 줄이는 것이 순차적으로 그려졌습니다. 현재의 상황은 어김없이 이렇게 되고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것이 위법이 아니라는 것이죠. 방학 중 임금과 보험료를 지급하지 않는 것은 6개월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함인데 모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면서 이뤄집니다. 이것은 편법으로 위법과 불법은 아니지만 분명 정의로운 것은 아니죠. 강의인력뿐 아니라 연구 행정도 같습니다. 대학은 정규직 직원을 뽑지 않고, 조교를 뽑아서 행정을 전담시킵니다. 단과대에 교직원은 단 한명으로 사실상 대학행정은 대학원 조교와 대학 조교로 돌아갑니다. 비정규직, 정규직 교직원을 두고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대학은 나쁜 사람을 더욱 나쁜 사람으로, 좋은 사람을 언제든지 나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구조입니다. 정규직 교수가 되면 견제할 수 없는 권력이 됩니다. 교수들은 그들의 행동을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이 일상이 되고, 문화와 상식이 되고, 결국에는 괴물이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간편하지만 바꿀 수는 없습니다. 구조를 직시하고 구조를 변화시킨다면 한 발 정도는 나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해결책이 없을까요.
“대학원생은 수 십 명이지만 교수들의 자리는 점점 줄고, 몇 년간 자리가 나지 않아 갈 곳이 없는 상황입니다. 특히 인문학 전공자는 50대에 강의를 하시는 분들도 비일비재합니다. 시간강사들은 교수가 되기 위해 많은 논문을 써야 합니다. 하지만 교수가 되면 논문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3년간 1편의 논문을 쓰지 않는 교수도 있습니다. 반면 시간강사들은 3년간 10편을 써야하죠. 결국, 제도적인 문제입니다. 사실 정부에서 법안을 만들어서 개입하지 않는다면 대학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향후 많은 강사들이 해고되고, 강의의 질은 나빠지고, 정규직들은 더 많은 강의와 행정을 떠맡고, 다시 강의의 질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질 겁니다. 대학이 기업화하고 있지만 기업도 그 무엇도 아닌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 역시 시간강사 시절에 노조가 있는 것도 몰랐고, 삶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지도 못하고, 왜 버티는 것이 힘들지 하는 자책만 하고 있었습니다. 둘러싼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당사자들이 노력할 필요가 반드시 있습니다. 대학원생 노조 등 당사자들을 조직화하고 주변과 환경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실 정부의 개입보다 이 부분이 더욱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주변 사람에게 또는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는 저 자신의 이야기이자 우리 세대의 얘기이기도 합니다. 선배들이 정규직 비슷한 자리로 가면 자신이 싫어하던 ‘꼰대’가 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역시 나약한 사람이기에 나이를 먹고 조직의 중심부로 가면 그렇게 변할 것이라 확신하고 지금을 기억해야 겠다는 마음입니다. 아파도 되는 청춘은 없으니까 모두 아프지 않기를 바랐고, 아팠던 걸 기억하고 당신이 어딘가 싸인을 하는 사람이 된다면 아픔을 추억하지 말고 기억해서 문화와 제도를 바꾸어 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적은 글입니다. 지금은 김민섭이어서 좋습니다. 교수 김민섭, 작가 김민섭, 김민섭 셋 중 선택해야 한다면 모두 좋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무엇이든 제가 선택한 것이어서 행복할 것 같습니다.”
취재=안형철기자/ 사진=김영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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