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는 정치가 사회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정치과잉사회다. 거창한 국가적 행위들은 물론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사까지도 정치논리와 정치적 감성이 내재되어 있는 나라다. 실제로 새로 집권한 정권들은 마치 나라를 통째로 바꿀 것처럼 강한 의욕을 보였고 마치 통치이념처럼 작동해왔다. 그때마다 온 나라가 공중에 붕 떠있는 것처럼 어수선했던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우리 국민들에게 개혁이나 개조 같은 용어들은 너무 익숙하고 그래서인지 현 정권의 적폐청산이라는 슬로건도 그렇게 새로워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개혁논리들은 항상 정치적 선·악을 구분하는 아니 내편·네 편을 구분하는 도구로 이용되어 왔다는 것이다. 정치에서 피·아를 나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또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 같은 선악논리가 정치 밖의 다른 영역에까지 확산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다. 좋은 기업과 악덕기업, 선한 단체와 사악한 단체처럼 선악을 기준으로 피아를 구분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유용할 수는 있어도 국가적으로는 불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정부가 표방하고 있는 적폐청산은 패 나누기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일천한 민주주의 경험과 단기간에 급성장한 자본주의 특히 오랜 권위주의 통치 등으로 말 그대로 고쳐야 할 잘못된 관행들과 부조리들이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것이 사실이다. 당연히 전근대적인 봉건적 인식들도 적지 않게 남아있다. 때문에 개혁이 필요하고 적폐청산도 해야 할 필요성은 있다. 문제는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이 선거 결과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이다. 당연히 선거는 선한 자를 뽑는 게임이 아니다. 그렇지만 선거에서 이긴 정파는 선이 되고 진 정파는 악이 된다. 이 때문에 모든 정권들은 이전 정권의 부도덕성을 마음껏 부정하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정치 뿐 아니라 한국사회 모든 조직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선거를 통해 선이라는 완장을 획득한 정권은 과거 맹렬히 비판했던 행위들도 자신들은 선한 정권이므로 괜찮다는 몰염치한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 이른바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행위의 정당성을 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주체를 가지고 판단하는 전유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연일 이어지고 있는 블랙리스트 의혹, 인사 부실 검증, 부동산 투기 같은 비판에 대해 청와대와 정부가 내놓은 해명이나 변명들을 보면 정말 그런 것을 실감할 수 있다. ‘현 정부에 그런 DNA는 없다’ ‘과거 정부에서도 그랬다’ 는 식이다.

선거에서 이겼으니 국민이 지지한 정권이고 그러므로 자신들은 그래도 괜찮다는 식이다. 반대로 선거에서 진 정파들의 같은 행위들은 비리고 범죄고 적폐가 된다. 이는 차이를 인정하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차별의 정치’일 뿐이다. 차별의 정치는 봉건적일 뿐 아니라 곧 반민주적이다. ‘군왕은 무치(無恥)’라는 왕정국가나 독재국가의 논리인 것이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왔던 제왕적 통치나 승자 독식의 정치가 이런 식으로 외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협의와 타협의 공생정치는 절대 불가능하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 정치처럼 극단적 비난과 갈등만 난무할 수밖에 없다. 정치가 선한 자와 악한 자의 싸움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우리 정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거에 올 인하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선거의 승패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언론매체들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여론조사 결과들도 이 같은 선악의 정치를 부추기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대통령이나 정당지지도는 물론이고 주요 정치현안이나 사건들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들은 모든 정파들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심지어 현안이나 사건의 내용보다 여론지지도가 평가를 지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더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성향에 의해 정책이나 사건들을 평가하는 이른바 ‘깔때기 효과’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조사절차나 객관성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지나치게 난립하고 있는 여론조사들은 우리 사회의 정치적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물론 가장 좋은 해결방법은 정치권과 정치인들의 인식이 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기대일 뿐 비현실적이다. 그렇다면 여론조사나 언론사들의 여론조사 보도들이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특히 결과가 지닌 맥락적 의미가 아닌 수치만 가지고 승자와 패자를 결정짓는 ‘여론몰이 식 조사’들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여론조사 수치만 가지고 우열에 초점을 맞추는 ‘경마식 보도(horse racing news)’들은 크게 비판받아왔다. 그런데 그 우열이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분하는 잣대로 이용되고 있다면 그건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다. 어쩌면 이게 진짜 적폐인지도 모르겠다.

황근 선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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