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저녁 강원도 고성군에서 시작된 산불은 순식간에 인근지역을 불바다로 뒤덮었다. 태풍급 바람을 타고 산을 넘나드는 초대형 불길에 사람들은 당황했고 긴급히 대피행렬에 올랐다. 그 중에는 이 일대로 수학여행을 온 평택 현화중학교 2학년 199명도 있었다. 아이들은 당시 고성군의 한 리조트에서 레크리에이션을 하던 중이었다. 그 때 한 교사에게 산불관련 재난문자가 전해졌다. ‘불길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교사들은 곧바로 리조트를 떠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지금부터 선생님과 안전요원들의 지시에 따라주기 바란다.” 김기세 교감은 긴급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아이들은 교사와 안전요원들의 인솔하에 대기하고 있던 고속버스 7대에 차례로 뛰어올랐다. 전원이 승차를 완료한 시간은 단 3분. 버스는 불길을 피해 속도를 높였다. 안도의 한숨을 돌리던 순간, 버스 1대에 불길이 옮겨 붙어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아찔한 상황이었다. 아이들을 탈출시키려 했지만 불 때문에 자동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전기장치를 수동모드로 전환하고 힘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아이들은 신속하게 밖으로 탈출했고, 버스는 이내 거센 불길에 휩싸였다.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날 새벽 아이들은 평택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리고 전원 귀가했다.

 

지난 4일 오후 7시17분 강원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서 발생해 속초시 장사동까지 확산한 산불에 버스가 불타고 있다. 사진은 4일 저녁 모습이다. 연합
지난 4일 오후 7시17분 강원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서 발생해 속초시 장사동까지 확산한 산불에 버스가 불타고 있다. 사진은 4일 저녁 모습이다. 연합

5년 전 그 날도 아이들은 수학여행을 떠났다. 안산 단원고 2학년 325명이었다. 인천 연안부두를 출발한 6천800톤급 카페리호는 제주를 향해 항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바람은 선선했고 파고는 높지 않았다. 모든게 순조로운 듯 했다. 이상 징후는 오전 8시50분경 감지됐다.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배가 심하게 요동쳤다. 진도해역 맹골수도 부근이었다. 이내 좌현으로 급하게 쏠렸고 후미부터 물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놀란 아이들은 당황했고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 때 조타실에서 안내방송이 전달됐다. “움직이면 위험합니다. 안전조치를 취할 때까지 가만히 있으세요.” 방송은 7차례나 계속됐고, 아이들은 그 말을 따랐다. 그러나 안전조치를 취하는 사람은 없었다. 배를 책임지는 선장은 제일 먼저 배를 버리고 탈출했다. 선원들도 잇따라 배를 버렸다. 현장에 도착한 해경은 물에 빠진 사람 몇몇을 건져 올렸을 뿐 300명이 남아있는 세월호와는 교신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승객들이 자력으로 움직이기 힘든 50도로 기울기까지 30여분의 시간이 있었지만 통솔할 위치에 있던 누구도 급박한 상황을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구명조끼를 입고 탈출을 시도했다면 상당수 아이들이 살았을 수 있었던 시간이다. 1시간 10분 후 배는 선수만 남긴 채 완전히 침몰했다. 250명의 아이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온 나라가 뒤집혔고 온갖 대책이 쏟아졌다. 행적마저 묘연하던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해경 해체를 발표했다. 재난 컨트롤타워인 국가안전처도 새롭게 출범시켰다. 청문회와 토론회도 수십차례 열렸다. 시민사회도 자성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모두가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달라진 건 없었다. 제천 화재로 29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인재였다. 밀양 병원화재로 38명이 숨졌다. 구조적 부실이 키운 인재였다. 인천에서 급유선과 낚싯배가 충돌해 15명이 숨졌다. 서로 피해가겠지 태만했다. 인재였다. 그리고 또 숨지고, 숨졌다. 수백명이 숨져도, 수천명이 다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무엇 때문일까. 우리의 어떤 DNA가 이런 상황을 반복시키는 것일까. 감독 강화하고 재원 더 지원하면 달라질 수 있을까. 인원 더 뽑고 제도 보완하면 달라질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결국 바꾸려고 해야 바뀌는 것이다. 그것을 운용하는 우리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인원을 보강하고 최신 시스템과 제도를 갖춰도 재난은 반복될 뿐이다. 내 일이 아니라는 이기적인 생각이, 돈을 위해서라면 절차 정도는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이, 적당히 타협하며 자리나 보전하려는 무책임한 생각이 설자리를 잃을 때 재난도 힘을 잃는 것이다.

 이번 강원도 화재 대응은 그런 '생각의 진화'를 보여줬다. 교사와 버스기사의 침착하고 적극적인 대처가 아이들을 구했다. 전국 각지에서 밤새 달려온 소방·경찰 공무원의 희생정신이 더 큰 피해를 막아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을 내 일처럼 도운 빛나는 시민의식이 무너져가는 공동체에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다. 우리 아이들이 주고 간 교훈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음주면 세월호 5주기를 맞는다. 아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의미를 지켜가자.

민병수/디지털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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