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舊韓末)은 대한제국을 뜻하는 구한국(舊韓國)이란 말에 왕조의 말기라는 의미에서 말(末)자를 붙인 것이다. 보통 대원군 집권 때부터 1910년 강제 한일병합 때까지를 말한다. 이때는 지도층의 무능과 외세에 시달려 결국 국권을 상실해 일제강점기로 넘어갔던 시기다.

독립운동가 황현은 구한말의 역사를 정리한 ‘매천야록’을 썼다. 구한말 위정자들이 저지른 비리와 비행, 일제 침략과 우리 민족의 저항을 서술한 귀중한 책이다. 그는 당시 무능하고 위선적인 지식인들을 질타하며 “국가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 원통치 않느냐”며 독약을 마신다. 글 아는 선비가 망국을 접하고 선택한 길은 순절(殉節)이었다. 매천은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반목, 고종과 순종의 무능, 외세를 업은 개화파, 선비의 비리 등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매천은 망국의 선비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 자결임을 보여줬다. 학(學)만 있고 의(義)와 절(節)이 없는 선비는 ‘지식팔이꾼’에 지나지 않는다. 매천은 암울한 시기에 글 아는 사람의 노릇을 절의(節義)로써 보여준 선비였다.

지금 우리의 지식인들은 과연 어떠한가? 곡학아세(曲學阿世)는 기본이고 전문가로서의 실력마저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즐비하다. 잘못된 것을 보고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지식인은 눈을 씻고 봐도 드물다. 대통령을 속이고 국민을 속인 간신배 같은 지식인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들의 선택이 국가의 흥망과 직결되는 중책임에도 공직을 일신영달(一身榮達)의 자리쯤으로 여겨 학자적 양심을 파는 지식인이 또 얼마나 많은가. 그들을 선택한 대통령의 책임도 크지만 간교한 표정과 그럴듯한 말로 국민을 기만하는 지식인의 책임이 제일 크다. 이들은 다수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도록 결집하는 역할은 포기한 지 오래다.

지금 우리는 깊은 곳에서 무언가 단단히 꼬였고, 길을 잃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리더십은 실종되고 국내외적으로 좌절과 고립이 가속화하고 있다. 체념과 분노와 반목만이 전부다. 이럴 때 지식인들이 나서야 한다. 2010년 스테판 에셀은 그의 나이 92세에 32쪽 분량의 작은 책 ‘분노하라’를 발표했다. 폭력에 저항하고 정치적 무관심과 체념을 떨치라고. 우리는 지식인들의 나약함과 타락에 분노하고 국민의 무관심과 몰이해에 좌절한다. 지식인의 책무는 진실을 찾아내 국민에게 알리는 일이다.

지금의 상황이 구한말과 다를 게 뭐가 있나? 맹자는 “나라가 망할 때는 반드시 스스로 망할 짓을 한 연후에 다른 나라가 망하게 한다”고 말했다.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가 탁상공론과 당파싸움만 있는 것 같아도 그 저변에는 참선비의 기개와 의리가 나라를 수호하는 충신(忠臣) 역할을 수행했다. 우리는 충(忠)이라고 하면 충성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충(忠)은 한자에서 보듯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마음의 가운데’(中心)에 두고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매천은 절명시에서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가 어렵기만 하구나”라고 탄식했다. 글을 배웠다는 것은 이토록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것이다.

자결은 못할망정 지식인답게 분노하고 국민을 바른 길로 이끄는 결기를 보고 싶다.

이인재 전 파주시장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