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는 엄마는 꿈이 뭔데? 학부모가 꿈이었어?”
2011년 사춘기가 온 중학교 1학년 큰 딸의 말은 충격이었다.
그럴 법도 했다.
봄날 이상연(48) 작가는 한국화를 전공했지만 대학교 때 만난 남편과 졸업 후 바로 결혼해 아이 둘을 키우며 살던 주부였다.
누구의 아내,누구의 엄마,누구의 며느리로 살던 그는 예술계를 떠난 지 이미 오래였다.
학부모로 살면서 남편 뒷바라지하고 아이들 잘 키우고 있었다.
꿈에 대해 생각해보던 그 때 자녀 학교에서 지역위원으로 초청된 문인화 작가 윤석애 선생을 만나면서 인생의 3막을 열었다.
다시 활동한지 올해로 9년차인 이 작가는 지난해 대한민국 미술대전 문인화 부분 대상을 수상하면서 입지를 굳혔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은 국전인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서 출발한 것으로 건국 이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신진작가 등용문이다.
비슷한 나이대의 화가들보다 시작이 늦었던 이 작가가 체급 자체가 다른 그들 사이에서 부단히 노력한 결과다.
그의 두 딸들은 세 번째 전시회를 앞두고 그의 도록에 이런 글을 남겼다.
“보통의 엄마들처럼 집에 있어준다고 속상해하지 마세요. 서로 서로 원하는 일 즐거운 일 하면서 살면 되죠. 엄마의 봄날은 끝나지 않을 거예요. 응원합니다.”
이 작가를 만난 건 어머니가 운영하는 한정식 식당이었다.
그 곳에는 이 작가의 작품이 곳곳에 걸려있었다.
애틋한 모정과 가게 내부를 따뜻한 해바라기들이 맞이하고 있었다.

-최근 세 번째 전시회를 무사히 마쳤다.
“지난달 29일부터 지난 4일까지 일주일간 전시했다. 국전에서 대상을 타면 내 고향 인천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협업 전시를 하고 싶었다. 콜라보에 대한 생각은 3년 전부터 했다. 인천의 유명인들로부터 시를 받고 나는 그림을 그려 하나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렇게 제작된 그림이 49점이다. 여기에 인천예일학교 학생들이 원목시계를 만들었고 거기에 내 그림을 넣었다. 작품 판매 수익금은 100%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쓰인다. 시계는 전체가 팔렸고 작품 49점 가운데 43점이 팔렸다. 이번 전시회는 재미있었다. 기존에 전시회라고 하면 테이프 커팅식을 하고 작가가 작품을 설명한다. 솔직히 식상한 전시회보다는 다른 전시회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작품 하나하나에 천을 씌워 제막식을 했다. 찾아온 관람객들도 궁금증을 갖고 관심을 갖는 모습을 봤다. 사회도 원기범 아나운서와 내가 함께 진행했다. 중간 중간 마이크 연결도 제대로 안되고 어려움도 있었지만 원 아나운서께서 많이 도와주셔서 진행 아마추어인 내가 화가로서 두 가지 역할을 소화해낼 수 있었다.”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한 수익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있는데.
“인천시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해 미술협회에서 개최해 준 전시회 때도 소아암 환우 돕기를 했다. 내 작품으로 달력을 제작해 판매했다. 당시 달력 500부가 판매됐고 수익금은 800만 원이 모였다. 전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길병원에 기부했다. 작품으로 기부할 수 있는 자체가 내게는 감사한 일이다.”

-기부에 대한 남다른 가치관이 있는 것 같다.
“어머니가 한국여성CEO협회 회장을 역임한 인천여성아너소사이어티 회장이다. 어렸을 때부터 도시락을 세 개씩 싸주신 분이다. 집에 있는 옷도 친구들과 나눠입으라고 베푸신 분이다. 어려서부터 베푸는 교육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기부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어머니로부터 배운 교육이다.”

-두 번의 전시회에 대해 언급했는데 첫 번째 전시회도 특색이 있었을 것 같다.
“그동안 학부모로 살았기 때문에 첫 전시회는 고등학교 두 곳에서 진행했다. 3주씩 총 6주간 학교에 내 작품을 전시했다. 당시에는 소규모로 18점을 걸었는데 아이들이 볼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뒀었다. 아이들이 관심을 갖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고민했는데 오히려 반응이 좋았다. 학교에서 진로강의도 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는 어떤 내용인가.
“‘엄마작가와 함께 떠나는 꿈 여행’이 주제다. 미술을 하고 싶어 하지 않더라도 미술 작품을 보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준다. 그러면 아이들이 금세 호기심을 갖는다. 그림에 찍는 낙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고 호(號)에 대한 설명도 한다. 호를 모르는 아이들에게 ‘태어나기 전 엄마 아빠가 지어준 이름이 마음에 꼭 들지는 않을 수 있어.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을 지어보자’라고 하면 상상 이상의 호를 지어낸다. 전시장의 문인화 작품을 접했을 때 보는 시각을 넓히도록 그림 보는 법을 알려준다.”

-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봄날’이다. 뜻은.
“한글로 호를 지었다. 윤석애 작가님의 스승님이 앞으로의 내 인생이 봄날과 같으라고 지어주신 이름이다. 마음에 든다.”

-대학 졸업 후 주부로 아이들 키우며 살림하다가 화가로 입문했다. 입문 전 어떻게 살았나.
“화가로 등단하기 이전에 학부모가 직업인 것처럼 살았다. 부모로서 살 때 정말 보람 있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나’라는 정체성은 없었다. 큰 애가 진로를 정하지 못하길래 생활기록부에 써야하는데 꿈이 뭐냐고 채근했다. 딸 아이가 엄마는 꿈이 뭔데 꿈을 강요하냐고 대답하더라. 그러면서 엄마는 학부모가 꿈이었냐고 묻는데 순간 ‘이게 뭐지?’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대학교 때 붓 글쓰기를 좋아했다. 문인화를 교양화로 가르쳐주는데 너무 재미있더라. 붓은 마음 자유자재로 가니까. 나도 그때는 사군자를 치는 여류화가가 되고 싶었다. 현모양처이면서 작가 활동을 하고 싶었는데 결혼에 육아가 따라오면서 붓을 잡지 못했다. 아이의 한 마디가 있고 나서 윤석애 선생님을 만났다. 내가 다시 붓을 잡는 계기가 됐다.”

-윤석애 선생이 한 번에 알아보셨나보다.
“당시 학교에서 만났던 윤석애 선생님께서 제 필체를 보고 서예를 했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서예를 배웠다. 그 분이 제 필체가 아깝다고 하셨다. 선생님 화실에 갔다가 난을 한 번 쳐보라고 하셔서 그렸더니 지금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하셨다. 본인도 39살에 시작했다며 당시 40인 저도 늦지 않았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인천 주안 화실을 다니게 됐다. 다른 사람보다 늦게 시작했으니 공모전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그림이라는 게 상만 타서 되는 건 아니지만 공정성을 인정받고 싶었다. 그 때부터 전국 공모전에 출전했다.”

-다양한 공모전이 기억에 남았을텐데.
“추사 김정희 휘호대회에서는 제주도에 내려가 그 자리에서 작품을 그려 냈다. 서양화의 경우 겹치기 수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휘호에서는 일필휘지(一筆揮之), 글씨를 단숨에 죽 내려써야한다. 휘호(揮毫)를 검증을 받는다. 국전에서는 특선 이상자가 되면 내가 그린 작품과 똑같이 그려내야 한다. 위작이 있을 수 없다. 매력이라면 매력이지만 어렵고 떨리는 일이었다. 종종 병을 핑계로 입원 등을 이유로 대고 수상작과 똑같이 그릴 때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더라. 그러면 수상은 바로 취소된다.”

-이곳을 둘러보니 거의 해바라기 그림이다. 해바라기를 그리게 된 이유는.
“문인화라고 하면 보통 매란국죽 사군자를 많이 그린다. 그런데 나는 보통의 소재들보다는 눈에 띄는 것을 그리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노란색을 좋아한다. 이 때문에 해바라기를 보고 씨 부분이 크니 그것을 문인화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는 집안의 자손이 귀하면 포도를 그렸고 남편이 입신양명하길 바라면 금색 잉어를, 부귀영화는 모란꽃 등을 그렸다. 이런 그림들은 그림 소재의 의미가 있는 정신예술의 상징물이 된다. 해바라기를 떠올리면 내가 살아온 인생과 비슷했다. 그동안 나는 한결같은 학부모로 올인했다. 그러다보니 지속성, 연속성, 하나의 마음 등이 비슷했다. 해바라기를 그리기 시작하는 작가법이 재밌고 계속 연구가 됐다. 단순하거나 식상한 그림들은 나와 맞지 않았다. 해바라기를 소재로 하니 센세이션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 건, 그만큼 주변의 시선이 따라올텐데.
“이게 문인화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문인화의 경우 난은 먹 하나로 하고 꽃 하나에 3~4가지 색상만 사용한다. 그러니 당연히 나보고 이렇게 많은 색감을 쓰냐고 묻더라. 나는 한 30가지를 쓴다. 내가 그린 해바라기의 씨 부분을 보면 노란색도 다양하다. 거무튀튀한 노랑, 개나리 노랑, 하얀빛 노랑. 노란색 하나를 표현하기 위해 옅은 노란색부터 브라운 계열까지 최소 20개 이상을 쓴다.”

-그럼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가.
“잎사귀는 단숨에 그린다. 단필로 그려야 한다. 먹과 브라운 계열의 색상만 섞었다. 하지만 해바라기는 꽃 부분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국전에 출전할 때 작품 하나에 한 달이 걸렸다. 크기가 작은 작품도 3일쯤은 걸린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그렸는데 전시작품이나 소소하게 그렸던 작품들도 수백 점은 된다. 1년에 40개씩은 그렸던 것 같다.”

-작품 활동은 어디서하나.
“집에서 한다. 둘째 아이가 아직 고등학생이라 학부모 작가다. 작품은 어머니 한식당에 전시해놓고 있다.”

-앞으로의 꿈은.
“미술을 하면 굶는다고 아이들이 꿈을 많이 포기한다. 사회 문화 자체가 예술가를 터부시한다. 아이들이 순수 예술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으면서도 생활고를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화가로서는 배움이 남아 홍익대 문화예술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전시기획과 미술관 경영을 하고 싶다. 나는 떠나도 작품은 남지 않나. 그래서 미술관을 갖고 싶다. 후학양성은 당연하지만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쳐주고 싶다. 까다롭고 재지 않아 인재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조현진기자/chj86@joongboo.com
사진=윤상순 기자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