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살펴보면 고려는 황제의 나라요 조선은 제후국이다. 고려 임금은 황제로서 자칭 짐이고, 조선의 왕은 스스로 과인이라 하였다. 고려가 만세를 외칠 때 조선은 천세를 올렸다. 고려는 처음부터 독자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조선은 1896년에야 연호 건양을 공표하였다. 고려는 문하성·중서성, 조선에는 이조·병조 같은 부서를 두었다. 천자의 왕도 주변을 기(畿)라 하므로 황제국 고려는 개경 주변에 ‘경기’를 설치하였다. 현재의 경기도는 천자국 고려의 행정조직 흔적이니 자부심이 담긴 지명이다. 원의 침입 후 황제가 ‘충성 충’자 붙인 왕이 되었으되, 고려는 자주성과 자존심이 강한 나라였다.

이에 견주어 조선을 보자. 1897년에 이루어진 조선의 칭제건원에 대해 꽤 의미를 부여하지만, 전후 맥락을 짚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일본과 청나라가 남의 땅 조선에서 벌인 싸움이 청일전쟁이고, 패전국 청이 배상에 합의한 것이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이다. 이 조약에 ‘청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는 조항 있는데, 이는 일본이 청나라 간섭을 배제하고 조선을 전적으로 도모하겠다는 포석에서 삽입한 것이다. 결국 이듬해 1896년 건양이라는 조선 최초의 연호 시행이나, 1897년 제국 대한 출범 모두는 조선의 자력에 의한 쟁취가 아니었다. 일본이 시모노세키조약에 깔아 둔 한일합병 시나리오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손발을 흔든 셈이다.

마뜩찮은 점은 또 있다. 한일합병 이후인 1919년 1월 고종임금이 승하하는데, 이때 신분은 대한제국 황제가 아닌 일본 천황가 ‘친왕 이태왕’이다. 백성들이 슬픔과 비분으로 분분히 일어날 때, 나라 앗긴 황족은 일본 준황족으로 편입돼 별 어려움 없이 살다 가셨다. 기미독립선언 직후에 있은 고종의 장례는 제국 대한이 아닌 일본의 국상이었다. 망국의 임금에게 올려 드린 종묘의 ‘고종’이라는 묘호도 일본 황실에서 내린 것이다. 그 아드님 묘호 순종도 이씨 친왕가 관리부서 이왕직를 통해 일본 궁내청이 결정해 보냈다.

이처럼 제후국 조선과 황제의 나라 고려가 크게 대비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역사교과서는 고려의 위상을 현양하는 데 그다지 충실하지 못한 듯하다. 고려에 대한 사료 대개가 중화사상에 젖은 조선시대 저작이긴 하나, 왜곡까지는 아니어도 치열히 탐구하여 최대한 고려의 자주성 드러내 국민들의 자존감 돋울 일이겠다.

국내 언론은 지금도 일본 천황(天皇)을 ‘일왕’으로 표기한다. 천황이라는 한자를 풀면 황제 중의 황제쯤 되니, 과거 조선의 ‘왕’에 비해 자존심이 상하기는 한다. 황제의 나라 중국이 1871년 이미 대청 황제와 대일본제국 천황 직함으로 동등히 수교한 점 생각하면, 한국의 자존심은 참 대단하다. 세계는 ‘천황’을 다만 고유명사로 판단해 호칭으로 인정한다. 이러한 일반적 수용이 거북하다면, 한자 표기 없이 일본 발음 그대로 ‘덴노’라 표현하면 어떨지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래도 탐탁치 않다면, 그깟 고유명사 붙잡고 속상해할 것 없이 대신 한국의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을 찾는 것은 어떨까?

나라가 위난에 처한 때 황제가 독립과 부국강병을 위해 무얼 했나 하는 내적 평가와는 별개로, 대한제국에 이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임금 고종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선왕의 묘호는 신하들이 논의하고 왕위 잇는 분이 낙점한다. 그런데 앞에 적었듯 고종과 순종 묘호만은 그 원수라 할 수 있는 일본 천황이 내렸으니, 이 마뜩찮은 것 던져 버리고 새로 지어 올리면 시원하겠다. 아직 당대의 사료들이 많으니, 일본인이 감수한 고종·순종 실록의 재편찬도 학계에서 검토하면 좋겠다. 조선왕조실록은 앞으로도 천년 이어가며 들춰 연구할 중요한 사료 아닌가!

유호명 경동대학교 홍보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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