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은 기본적으로 사료(史料)에 근거한다. 달리 말하면 역사학은 사료의 제약을 받는다. 그런 점에서 사료가 전하는 내용이 부족하거나 오류일 경우 역사학은 한계에 봉착한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관련 사료 자체가 부족하거나 교차 검증에 필요한 제3의 자료가 없을 경우 더욱 그러하다. 올 3월과 4월엔 전국 곳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행사가 유독 많이 벌어졌다. 국민적 관심도 높았다. 특히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고 드러났다. 독립운동과 관련된 대한적십자회의 활동도 그렇다. 100년 전, 3·1운동과 함께 인도주의를 실현하는 대한적십자회가 다시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결코 저버릴 수 없는 뜻 깊은 날이다. 처음엔 1905년 고종 황제의 칙령으로 대한적십자사가 창립됐다. 자주국가로서 주권을 지키기 위해 탄생됐다. 하지만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일제는 ‘대한제국의 적십자사를 일본적십자사와 합쳐 보호하겠다.’는 명분아래 설립 4년 만에 문을 닫게 했다. 폐사(閉社)다. 국가 강제 병합(倂合)과 관련, 적십자 존재 자체가 큰 장애물로 생각되어 미리 제거한 것이다. 자주적 국가 활동이 단절되었지만 대한제국의 운명과 함께한 대한적십자회는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에도 ‘동포를 구하고 독립군 전상병을 구호한다.’는 이념으로 독립군의 의료보조기관으로 고통 받는 전상병의 구호를 책임졌다. 독립자금 조달과 국제 활동 등 임시정부와 발맞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임시정부 설립 4개월 후인 1919년 8월29일, 안창호·이희경·여운형·안정근 등 애국지사들의 뜻에 따라 대한적십자회가 다시 설립되었다. 꺼져가는 인도주의에 숨을 불어넣었다. 초대회장에는 의학박사로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평안도 대표이자 외무차장을 역임한 이희경이 맡고 고문에 안창호, 이사장에 여운형, 부회장엔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자, 임시정부 임시의정의원을 역임한 안정근이 맡았다. 김 구·김규식·김 철은 대한적십자회 상의원, 명예총재에는 서재필, 이동휘·문창범은 자문위원을 맡아 활동했다. 항일운동 주역을 담당했던 인물 들이다. 당시 독립운동 단체 조직원들은 적십자 활동을 겸하고 있었다. 처음엔 대한제국이 독립된 주권 국가임을 알리려는 의도를 갖고 고종 황제의 중립외교 정책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면 임시정부가 설립한 대한적십자회의 가장 큰 임무는 부상당한 독립군 치료와 독립운동 자금조달이었다.

먼저, 대한적십자회는 전시 및 천재 사변에서의 상병자 구호를 위해 ‘적십자간호원양성소’를 설치하여 독립전쟁에서 부상당한 병사들 치료에 나섰다.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한 회원을 모집했다. 이때 더 많은 회원을 모집하기 위하여 달력과 배지를 제작했다. 당시 제작한 달력에는 ‘빗발같은 총알 아래 귀신같이 다니면서 슬픈 영혼 위로하고 아픈 상처 처매준다.’는 임시정부의 적십자회의 표어를 넣어 적십자의 역할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그 결과 1921년 11월에는 회원이 3천439명으로 늘어났고 약 1년 반 사이에 8천226원 66전, 지금 돈으로 약 6천500만 원의 회비를 모았다.

하나의 나라에는 하나의 적십자사만 존재한다. 대한적십자회를 통한 독립운동은 국제사회에서도 계속되었다. 일제 탄압 속에서도 1921년 2월, 제네바에서 열린 제10회 국제적십자회의에 이관용을 파견하여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이 같은 활동은 ‘독립국가의 적십자사만이 그 회원국이 될 수 있다.’는 규정에 가로막혀 실패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일본정부와 일본적십자사를 규탄하는 항의문을 제출했다. 외국에 거주하는 동포를 위한 영문홍보지를 제작하여 배포하는 등 대한적십자회를 통한 독립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과거의 단순한 회고가 아니다. 역사는 가장 탁월한 미래학이다. 과거를 돌아보는 목적은 미래의 길을 찾기 위해서다. 인도주의를 향한 끝없는 열망으로 대한적십자사는 그 후 전쟁의 상처를 보듬고 헌혈로 생명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또한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통해 남북관계의 물꼬를 텄다. 100년 전, 함께 외친 평화와 자유 그리고 인도주의 활동을 펼쳐가는 적십자가 있어 우리는 희망을 갖는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지 않으면, 우리는 앞선 세대의 실패를 똑같이 되풀이할 수 있다. 좋은 일에서 가르침을 받고 나쁜 일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보다 나은 적십자로 발전할 수 있다. 나라와 민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던 임시정부 적십자 선배들의 얼을 계승하여 생명을 보호하고, 고통을 경감하는 인도주의 활동을 펼쳐가야 한다. ‘대한’을 맨 앞에 두고 국민과 함께 나아가야 한다.

김훈동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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