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탄핵이후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유난히 ‘소통’에 방점을 두고 출범하였다. 이전 정권이 워낙 폐쇄적이고 권위적이었다는 반작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오랜 기간 인터넷이나 모바일을 통해 지지기반을 다져왔던 경험에서 체화된 자신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 때문인지 정권초기부터 국민들과 소통하기 위한 다양한 채널들이 수없이 만들어졌고, 이전 정권과 달리 핵심인사들이 SNS를 통해 개인 의견을 수시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소통 정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일 것이다. 국민들이 바라는 것을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이 직접 챙기고 또 청와대가 나서서 해결해 주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얼핏 보면 국민들이 뽑은 대표자에게 국정을 위임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대의민주주의의 단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인 것처럼 보인다. 또 국민들 입장에서는 어렵고 경직된 행정 절차를 거치지 않고 신속하고 자유롭게 자기 생각이나 요구를 직접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를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오는 청원 숫자도 점점 많아지고 있고, 청원에 동의하는 숫자도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늘어났다. 급기야 최근에 패스트트랙 상정을 몸으로 막았던 ‘자유한국당 해산 청원’은 역대 최고기록을 갱신했다고 한다. 물론 이 숫자가 정확하게 국민 의사를 반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청와대 청원 게시판은 주요 사회 이슈들에 대한 여론 동향을 보여주는 잣대가 된 것 같다.

그렇지만 달리 보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은 특정 이슈들을 둘러싸고 갈등하고 있는 집단들의 열렬 지지자 마치 ‘붉은 악마 응원단’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청와대 청원 게시판은 특정 정파나 집단의 지지자들은 청원 댓글이나 지지숫자 늘리기 싸움판이 같은 모습이다. ‘자유한국당 해산 청원’에 대응해 ‘더불어민주당 해산청원’이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최근 지나치게 오·남용되고 있는 여론조사결과와 함께 우리 사회를 점점 더 극단적 갈등상태로 몰고 가는 주범이 된 것 같다.

한마디로 인터넷 담론의 가장 큰 병폐라 할 수 있는 ‘집단 극단화(group polarization)’ 현상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 근본을 위협하는 감성적 집단행동에 기반을 둔 우중정치(愚衆政治)를 창궐하게 될 토양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중정치는 필연적으로 대중들의 감성적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인기영합주의(populism)로 발전하게 된다. 또 인기영합주의는 민주적 의사결정과정과 절차적 합리성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인기있는 최고통치자의 절대 권능에 의존하게 되는 전체주의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말해주고 있다.

21세기 디지털 시대는 최첨단 기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등, 참여, 공유라는 인간의 근본적 삶의 양식 변화에 대한 대응결과라 할 수 있다. 모든 기술이 그러하듯 최첨단 디지털기술 역시 인간에게 엄청난 혜택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이 중에 어떤 것이 될지 결정하는 것은 기술에 내재된 속성들이 아니라 기술을 이용하는 인간들의 욕망과 판단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역시 모든 국민들의 평등, 참여, 공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지금처럼 맹목적인 집단감성이 지배하게 되면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지금 세계는 200여년 이상 지배해왔던 획일화된 집단원리가 붕괴되고 각자의 의사가 평등하게 존중되는 탈 집중화 시대로 급속히 이전해가고 있다. 인터넷 디지털 기술들을 그런 추세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최근 온·오프라인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보면, 한국사회는 유난히 획일화된 집단동력이 점점 더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느낌이다. 청와대 청원게시판이 그런 현상을 조금이라도 부추기고 있다면 당연히 폐쇄되는 것이 맞다. 또 청원 게시판에 올라오는 청원내용을 보면 자칫 국민들에게 대통령은 뭐든지 다 해결해 줄 수 있다거나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어 보인다. 또 특정 집단이나 개인들의 세력을 과시하는 도구처럼 오용될 수도 있다. 그 어느 것이라도 충분히 폐쇄시킬 명분이 된다.

황근 선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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