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더듬어 보니 내가 처음으로 음식 만들기에 관심을 가졌던 때가 열여덟 살이 채 되기 전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즈음 고향을 떠나 상경 후 왕십리 어느 중학교 담벼락에 붙은 허름한 방 한 칸을 빌어 자취(自炊)를 시작하면서였는데, 당연히 하숙할 형편이 못되어서 그리하였으나 후일 다소 처지가 나아졌을 때도 자취를 고수했다. 처음에는 주머니 사정상 단지 끼니를 때우는 수준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발전하여 조리에 대한 재미를 붙이게 된 것도 자취를 계속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몇 년 전 어느 TV 프로에서 유명 셰프를 통해 소개된 ‘꽁치통조림 김치찌개’나 ‘통조림 고등어구이’ 같은 것은 그때 이미 나름 몇 차례씩 시도(?)해본 것들이다. 이런 음식 만들기는 평생 취미로 이어져 교단을 떠나 시간적으로 비교적 자유롭게 된 지금, 가끔 아들 부부가 찾아올 때면 아마추어 셰프인 아버지표 요리 두어 가지를 식탁에 올려놓고 가족 간의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한다.

요리에도 철이 있다. 딱히 미식가가 아니더라도 연중 가장 영양이 풍부하고 거기다 저렴하기까지 한 제철음식은 맛도 있고 면역력을 높일 수 있으니 건강에도 좋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때 이른 더위가 5월을 달구고 있어 나른하니 입맛이 떨어지는 요즘 벌써 시원한 바닷바람이 그립다. 그럴 수만 있다면야 지금이라도 저 남해, 통영으로 달려가 한창 제철일 도다리, 갑오징어에 참다랑어 같은 해산물 요리로 활력을 충전하고 싶지만 당장에 오늘 손쉽게 가능한 식단을 생각하다 문득 멍게가 떠올랐다. 4,5월에 난 것이 살이 꽉 들어차 가장 맛이 좋다고 하는 이 멍게는 원래 우렁쉥이의 경상도 사투리였지만 표준어인 우렁쉥이보다 더 널리 쓰이게 되자 우렁쉥이를 제치고 표준어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신티올이라는 불포화 알코올 성분으로 인한 독특한 향과 달콤 쌉쌀한 맛을 가진 멍게는 나른한 봄철,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데 제격이다. 이는 무엇보다 피로 해소에 탁월한 타우린 함유량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멍게라 하면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가장 간단한 멍게회를 떠올린다. 그러나 숙회, 무침, 초밥, 물회, 전, 튀김, 탕수, 찜, 비빔밥까지 최근엔 의외로 그 조리법이 많이 개발되어있다. 그중에 오늘은 집 나간 입맛을 불러오는데 이만한 것도 없다는 멍게 비빔밥을 만들어 보려 한다. 새싹이나 돌나물, 상추, 양배추, 당근, 오이, 깻잎 등 냉장고에 남아있는 야채라면 무엇이든 좋다. 그리고 멍게를 사러 갔을 때 해초와 홍합을 잊지 않는 것은 남다른 센스다.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 한 공기를 비빔 그릇에 담고 채 썰은 채소와 해초를 종류대로 동그랗게 돌아가며 두른다. 다음, 고소한 참기름에 김 가루를 뿌리고 홍합 삶은 진국과 어간장을 더한다. 초고추장을 쓰지 않는 이유는 자극적인 양념으로 인하여 멍게의 쌉싸름한 산미를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보기 좋은 음식이 맛도 좋다지 않았던가! 그 알록달록 예쁜 모양새를 잠시 눈으로 음미한 후, 밥 한술 떴을 때 어느 한쪽으로 그 맛이 부족하거나 과하지 않도록 쓱쓱 고르게 비벼낸다. 신선한 멍게와 채소, 자극적이지 않은 양념이 어우러진 ‘바다 향’을 느낄 수 있다. 도다리쑥국 생각이 나겠지만 미역국만 곁들여도 금상첨화다.

요리의 기본은 조화다. 마치 개성과 자율, 다양성과 대중성이 중시되는 현대사회에서 몸과 마음, 남성과 여성, 이성과 감성, 강함과 부드러움, 따스함과 차가움 중 어느 한쪽이 일방적일 때 그 사회는 조화로운 사회가 될 수 없듯이, 수많은 재료 중에 특정한 요리를 위해서 그에 맞는 재료를 활용하지만 그렇다고 어느 재료를 과다하게 사용하여 한 가지의 강한 맛이 그 음식의 맛을 지배해 버린다면 그것은 실패한 음식이 된다. 오케스트라 협연에서 여러 악기들은 그날의 주인공인 독주 악기의 소리의 크기와 하모니를 고려하며 연주해야 하는 것처럼, 그날의 주된 재료가 제맛을 내기 위해 부수적 재료들은 은밀히 주연을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재료는 서너 가지이지만 두 세배도 넘는 첨가된 재료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맛있는 요리가 훌륭한 요리다.

박정하 중국 임기사범대학교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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