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인기있었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는 충무공 이순신을 도와 활약하는 입부(立夫)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많은 이들이 궁금해했었다.

특히 광명지역 시민들로부터 문의 전화가 자주 왔었다. 전화 거신 분들은 이순신 묘가 광명시의 향토문화유산(4호)으로 이미 지정된 사실을 알고 더욱 궁금해했었다. 이와 비슷한 일이 90년대 후반에 드라마 ‘용의 눈물’이 방영되던 때 이숙번이란 등장 인물에 관심이 높아지며 시흥시 산현동 소재의 묘에 많은 방문객이 찾었던 현상이 연상된다. 그 때를 계기로 이숙번의 묘는 정비하여 지금은 방문객들이 찾기 쉬운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입부 무의공 이순신의 묘는 지금 한창 개발중인 광명시 일직동 서독산 자락에 있다. 이 자리에 묘가 자리잡게된 것은 이지역이 예전 전주이씨 양녕대군파의 토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묘소에는 묘비는 남아 있지않지만 비문이 미수 허목의 문집인 『기언』에 실려 전하고 있다. 묘는 고려시대의 전통적 양식인 방형봉분 앞에는 문인석, 망주석, 상석, 향로석, 문방석 등의 석물이 놓여 있다. 문인석은 안상문, 당초문, 연판문이 새겨진 흔치 않은 형태이고, 망주석은 운각과 염의가 조각된 전형적 형태이다. 한편 해군에서는 1999년에 건조된 국산7호 잠수함의 이름을 이순신호로 명명하여 기리고 있으며 함장이 새로 부임하거나 하면 승무원들이 묘소를 찾아 참배를 하고 있다.

무의공 이순신은 한글로 충무공과 동명이인의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의 본관이 충무공은 덕수 이씨이고 무의공은 전주이씨로 연관이 없다. 이름의 한문도 충무공은 순신(舜臣)이고 무의공의 이름은 순신(純信)으로 전혀 다르다. 그렇지만 충무공 휘하의 중위장으로 당항포, 한산도 해전에 참전을 하여 큰 공을 세웠고 충무공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도 참전하였다. 이 해전에서 충무공이 전사하자 전투를 독려하여 승전으로 이끌었다. 이와 같은 공으로 선무공신 3등과 완천군(完川君)에 책봉되었다.

젊어서는 학봉 김성일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나 무예에 관심이 많아 무과로 급제하게 되었다. 관직초기에는 당시 조선의 무관들이 그러하듯이 여진족 방비를 위한 북방 경계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나 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방답진첨절제사가 되어 남해안 방비에 힘쓰게 되었다.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보면 무의공은 활을 잘쏘아 장수들의 겨루기에서 항상 1등을 차지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또한 충무공이 올린 보고서에는 “이순신(李純信)은 호남 영남 개전 이래 10회에 걸쳐 1회는 중군(中軍)을, 9회는 선봉을 맡아서 오직 적의 기세를 꺾는 데 전념했다”는 기록이 있다.

무의공 이순신의 경우처럼우리 우리 나라 지역 곳곳에는 이야기를 간직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숨어 있다. 한적한 시골이었던 이순신묘는 주변의 KTX광명역개발과 등산로 정비로 심심찮게 방문객이 찾는 장소가 되고 있다. 본인도 현재 문화재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업무에 종사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아직 이와같은 문화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에는 많이 부족한 형편이다. 무의공 이순신 묘의 경우만 봐도 여러 이유가 있으나 우선 묘가 위치한 토지와 진입로가 사유지이고 더군다나 문화재와 직접 연고가 없는 타인 소유이다보니 정비를 추진하는데 한계가 있는 점이다. 문화재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문화재의 현장성을 수용자들이 알수 있도록 접근성이 좋아야 하는데 1차적인 문제에서부터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이제라도 시민들이 찾기 쉬운 공간이 되어 활용할 수 있도록 뜻을 모으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양철원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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