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정의의 출발이다. 뜨거운 분노가 있어야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2월 남긴 어록이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 파면을 예상하고, 대선 행보를 하던 중 강조한 이야기다. 민주당 내 경쟁자였던 안희정 당시 충남지사가 “박 대통령이 선한 의지로 좋은 정치를 하려 했는데 뜻대로 안됐다”고 하자 “안 지사 말에는 분노가 빠져 있다”고 공격하면서 한 발언이다. 이후 청와대에 입성한 문 대통령은 박근혜·이명박 정권에 대한 분노를 수시로 표출하면서 각종 수사와 조사를 지시했다. 취임 다음날인 2017년 5월 11일엔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 철저 수사를, 그달 22일에는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대한 감사원 정책감사 실시를 지시했다. 7월엔 “방산비리는 이적행위”라며 강도 높은 수사를 하라고 했다.

박근혜 정부 고위직 수십 명을 교도소로 보낸 ‘국정농단’ 수사와 재판은 여전히 진행형이고, 억울함과 치욕을 느낀 몇몇 인사는 목숨을 끊었다. 4대강 사업에 대한 감사원의 네 번째 감사는 과거 감사 결과를 스스로 부정하고 정권 입맛에 맞게 결론을 정리한 ‘정치감사’란 지적을 받았다. 지금 4대강 주변에선 보(洑) 해체 등 감사 후속조치를 둘러싼 분열과 갈등으로 후유증을 앓고 있다. ‘방산비리’의 경우 무죄를 받은 피고인들이 전 합참의장을 포함해 즐비하다. 대통령이 예단과 분노에 근거해 무리한 지시를 하고 수사당국은 대통령을 의식해 과도한 수사를 했다는 것을 50%에 가까운 사건 무죄율이 말해 주고 있다.

문 대통령은 2017년 5월 17일 법무부와 서울중앙지검의 ‘돈봉투 만찬’을 묵과할 수 없다며 이영렬 지검장과 안태근 검찰국장에 대한 감찰을 지시했다. 같은 해 8월엔 박찬주 육군대장 부부의 공관병 ‘갑질 의혹’을 질타하면서 “뿌리 뽑으라”고 했다. 이들은 모두 박근혜 정부에서 출세했던 사람들이다. 대통령의 분노가 전해지자 검찰은 이 지검장과 안 국장을 면직했고, 법정에 세웠다. 그러나 이 전 지검장은 무죄와 복직 판결을 받았다. 안 전 국장은 돈 봉투가 아닌 별건의 사건(인사보복)으로 실형을 살고 있다. 대통령 노기(怒氣)가 영향을 미쳐 구속된 박찬주 전 대장은 ‘갑질’ 문제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대신 김영란법을 위반한 죄(760만 원 어치 향응을 받았다는 것)로 400만 원 벌금형을 선고받아 수사의 치졸성만 부각됐다.

두 사건의 경우 대통령이 분노를 공개적으로 나타내면서 수사하라 마라 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이 지시를 한 까닭이 분노를 참지 못해서인지, ‘적폐청산’이란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지, 둘 다 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시시콜콜한 지시가 대통령의 격에 어울리지 않고, 대통령의 분노 표출이 지나쳤다는 것은 법원 판결로 증명되지 않았나 싶다.

문 대통령이 정의의 근본으로 애지중지하는 ‘분노’의 대상은 과거 정권과 야권으로 한정되어 있다. 대통령이 그렇게 화냈던 검찰의 ‘돈봉투’사건보다 더 한 잘못이 대통령 주변에서 벌어져도, 민노총이 무법천지의 난장판을 숱하게 벌이면서 공권력을 유린해도 대통령은 말이 없다. 청와대 비서실 곳곳에 ‘춘풍추상(春風秋霜,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내게는 가을서리처럼)’이란 액자를 걸게 한 대통령이 행동은 정반대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분노는 일방적인 것이고, 그걸 바탕으로 한 그의 정의는 편향적이고 편의적인 것에 불과하다. 문 대통령의 정의가 온전하다는 평가를 받으려면 ‘내 편의 잘못’, ‘민노총의 불법’에 서릿발 같은 분노를 표출하고 바로잡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에게 필요한 건 ‘정의의 평등’이다.

이상일 전 국회의원·건국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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