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에 위치한 3.1운동 기념탑 '태극의 울림'의 모습이다. 성남 율동공원에 지난 2006년 설치된 이 기념탑은 우물과 태극 속에 담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성남지역에서는 남한상성을 중심으로 무단통치에 반대해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정치투쟁이 결집됐다. 

경기도 성남 지역의 3.1만세운동

남한산성 지역을 둘러싼 광주와 성남, 서울 송파, 하남지역의 경우 의병 항전의 정신을 이어받아 만세운동으로 분출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결집한 의병들은 남한산성을 점거하고 서울진공작전을 구상하였다. 비록 이 작전은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남한산성 의진(義陣)은 경상도로 이동하여 끝까지 항전하였다는 점에서 기억해야할 사건이었다. 그 후 러일전쟁이 끝나고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7년 군대가 해산되었을 때 성남지역에서는 남상목(南相穆)과 윤치장(尹致章) 의병부대가 나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남한산성 지역의 3.1운동은 무단통치에 반대하여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정치투쟁이 결집되어 나타난 것으로 대표적인 민중의 생존권 투쟁이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식민지 무단농정 철폐와 토지 분배, 가혹한 세금의 철폐 등을 요구하는 민중의 의지가 일시에 분출된 것이었다.

오늘날 서울 한강이남 지역과 성남, 하남시 일대는 1919년 당시 경기도 광주의 행정구역에 속해 있었다. 성남지역은 광주군 중부(中部), 돌마(突馬), 낙생(樂生), 대왕면(大旺面) 일부였고, 하남시는 광주군 동부, 서부면과 중부면 일부였다. 성남지역의 1910년대 후반기 민족운동은 일제 무단통치에 정면으로 반대한 투쟁이어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성남과 하남 지역의 3.1운동은 3월 하순에 집중적으로 시작되었고, 횃불 시위운동은 4월까지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성남지역의 시위 형태는 대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평화적 시위에서부터 밤에 산에서 횃불과 봉화를 올리며 만세를 부르는 횃불, 몽둥이를 들고 관공서 등을 공격하는 무력시위 등으로 전개되었다.

중부면(현재 수정구와 중원구 일부)의 만세시위운동은 남한산성을 중심축으로 전개된 것이 특징이다. 중부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운동은 숯골 주민 300여명이 주도하였다. 남한산성 남문에 집결한 만세 시위대는 산성 안으로 진입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단순 시위운동에서 방향을 전환한 것은 시위대가 면사무소에 집결하면서 만세에 동참하지 않은 면장을 곤봉으로 가격하여 실신시키는 등 과격한 양상으로 전환하였다. 만세시위는 횃불을 신호로 치밀하게 대처하여 조직성과 중부면민의 단결된 역량을 과시한 것이었다.

돌마면 율리의 한백봉의 사진. 한백봉은 3월 28~29일 수백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 행진을 계속했다.

지금의 분당 일대인 돌마면의 시위운동은 농촌의 지식인층 일단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점이 특색이다. 이런 관계로 참가자가 증폭하였고, 판교지역의 낙생 면민과 연합시위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돌마면 율리의 한순회(韓順會), 한백봉(韓百鳳)은 1919년 고종 장례식에 참여한 후 3.1운동을 직접 경험하였다. 이들은 면내의 유지들과 접촉하면서 만세운동을 모의하는 한편 낙생면 초대면장 남태희(南台熙)와도 연계하여 거사를 도모하였다. 한백봉은 3월 28~29일의 양일에 걸쳐 돌마면의 각 마을을 순회하면서 수백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 행진을 계속하였다. 거사 당일 10시경 분당리 장터에 군중이 운집하자 한백봉 등은 만세 시위를 주창하여 본격적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면내를 순회하는 동안 시위 군중이 늘어났고 오후에 낙생면 소재지 판교리에서 남태희가 주도한 시위 군중과 합세하였을 때 시위 군중은 3천여 명에 달하였다고 일본 측에서 '조선소요사건일람표'에 기록하였다. 한백봉은 밤에는 횃불, 낮에는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1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돌마?낙생면민의 연합시위는 규모나 영향력이 지대한 것이었다. 시위운동의 주도자들은 28일에도 봉화를 올리고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29일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일제 헌병이 시위 군중을 강제 해산시키고 주도층 일부를 체포하자 일정 부분 시위는 약화되었다. 돌마면 출신의 한순회(韓順會)는 천도교 광주교구장을 지내면서 1918년 10월부터 1919년 4월까지 특별 성미를 갹출하여 천도교 중앙총부로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에 더욱 열중하였고, 멸왜기도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대왕면의 만세 시위운동은 중대면 송파리에서 일어난 시위운동이 이 지역에 파급되면서 시작되었다. 돌마면 여수리가 본적인 이시종(李時鍾)은 농사에 종사하던 중 송파시위에 참가한 후 대왕면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조선독립신문의 독립에 관한 기사를 가지고 수서리에 돌아와 마을의 이재순(李載淳), 이규문(李揆文) 등 100여 명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시종은 군중에게 “오늘까지는 이 면사무소에서 일본을 위하는 일을 보고 있었지만, 이제 조선이 독립하게 되어 부역, 세금 등은 필요 없게 될 것이다”라고 자신의 소견을 발표하였다. 시위대는 만세를 고창하면서 면사무소에 집결하였고, 일부는 면사무소에 진입한 후 조선독립신문을 꺼내 독립의 당위성을 낭독하였다. 이시종과 이재순은 이튿날 헌병주재소원에 피체되었다. 일제는 이들에게 정치에 관한 불온한 언동을 하여 군중을 선동함으로써 치안 질서를 방해했다는 명목으로 보안법을 적용했다. 재판 결과 이시종은 징역 1년, 이재순은 징역 8개월에 처해졌다. 대왕면 시위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부역과 세금에 반대한 운동이었음을 나타내는 명백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대왕면의 만세운동은 일제의 부역 징발과 토지 수탈에 반대하여 민족의 의지를 반영한 독립 투쟁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남 교산리 출신의 이대헌의 사진. 이대헌은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각각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하남지역에서는 3월 26일 교산리 출신 이대헌(李大憲), 이영헌 등이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면사무소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다음 날 새벽 2시에도 수십 명이 마을 뒷산인 객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며 1시간 동안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후, 새벽 3시경 하산하여 동경주에 있던 동부면사무소로 행진했고, 다시 오전 11시경부터 약 3시간 동안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망월리 구장 김교영(金敎永)도 3월 27일 아침 김용문을 통해 사람들을 모아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동부면의 만세시위는 천현리의 기독교인이 참가함으로써 500여 명이 넘는 대규모로 확대됐고, 이때 천현리 주민 14명이 검거됐다.

감일리의 구희서(具羲書)는 3월 27일 주민 40여 명을 모아 서부면사무소와 구천면 상일리 헌병주재소 앞까지 시위행진을 벌였는데, 일본 헌병의 무력 진압으로 2명이 죽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같은 날 산성리 주민 200여 명도 만세시위에 참가했고, 남한산성에 봉화가 오르기도 했다. 만세시위에서 검거된 14명 가운데 이대헌, 김교영, 김홍렬은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각각 징역 2년, 징역 1년 6월, 징역 1년씩의 옥고를 치렀으며, 구희서는 징역 8개월을 치렀다. 하남의 만세시위는 천주교인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그 당시 천주교 중앙본부가 만세시위 참여를 적극 말리던 상황과는 대조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광주지역의 3?1운동은 대개 3월 하순에 집중적으로 일어났으며. 남한산성 주변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은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봉화를 올려 관심을 유도한 것이 특징이다. 한편으로 실질적인 시위운동이 부적절한 경우에는 지속적으로 횃불을 올림으로써 독립의지의 기상을 표현하는 수단도 동원하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만세운동이 비폭력 평화적 시위였다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일제가 총으로 시위를 진압하는 데 비해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비폭력이었지만 실제로는 과격한 시위가 전개되기도 하였다. 광주군 오포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면영(柳冕永)의 경우 폭력불사를 명확하게 명시하고 있다. “일제강점 이래 10년이 되는데 금후는 독립하기로 되었으니, 일동은 만세를 부르라”고 말하고 군중에게 독립만세를 절규하게 한 다음, “이제부터 광주 군청으로 몰려가라. 그 곳에 가서 만일 헌병들이 발포하더라도 퇴각하지 말고 일심동체가 되어 그들을 체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선동하였다.

지금의 서울 강동구 지역인 구천면에서는 3월 27일 시위 군중 1천여 명이 상일리 헌병주재소 앞에서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대가 주재소를 완전 포위한 상태에서 투석을 하며 쇄도하자 진압 헌병이 발포하여 구천면장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경안면의 경우 광주군청 앞에서 시위대 2천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면서 광주 군청과 우체국에 투석하여 유리창을 파손하였다. 흥분한 시위대는 헌병 상등병 1명과 헌병보조원 2명 및 재향군인 3명의 총기 탈취를 시도하려 하자 진압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즉사하고 15명이 부상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1919년 이후에도 성남지역 독립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숯골의 농민 김교상(金敎爽)은 인쇄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1920년 4월부터 음력6월 까지 독립에 관한 각종 인쇄물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는 ‘대한독립운동을 위하여 생명 재산을 걸고 대한독립단 중앙부의 명에 복종할 것을 맹서함’이란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 서약서 약 1천매를 비롯하여 기타 어느 것이나 조선독립운동을 고취하는 문사(文辭)를 기재한 경고문 약 2백, 암살단 취지서 약 3천, 대한독립단 지방부 시행 규령 80권, 선포문 약 1천매, 대한독립단 경무국 시행 규령 약 3백 40권, 대한독립단 취지서, 포고서 등을 인쇄 출판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백봉, 한순회, 이대헌 등 3.1운동 당시의 만세운동을 이끈 지도자들은 1927년 신간회 광주지회가 결성에도 참여하여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성남문화원에서는 3.1운동 80주년이던 1999년 3월 1일부터 성남 3.1운동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기념식을 개최하기 시작하여 100주년이 된 올 해 까지 20년째 기념행사를 개최해 오고 있다. 2006년에는 만세운동이 처음 일어난 율동공원에 성남 3.1운동기념탑을 건립하였고, 해마다 독립운동가 묘소 참배와 기념탑 헌화, 기념식 거행, 학술토론회 개최, 태극기달기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윤종준(성남학연구소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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