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사한 봄날 벚나무 밑에 앉아, 혹은 울긋불긋 단풍 아래서 원고지 채우고 그림 그리던 학창시절 그립다. 지금과 달리 진학 목적의 스펙쌓기에서 자유로웠으므로, 상을 받으면 좋지만 그렇지 못해서 속상했던 기억은 없다. 글짓기는 오롯이 감성의 축적이나 품성의 함양이었다. 필자 어렸을 때는 학교마다 문예반이나 독서반 활동 왕성했고, 여학생들과의 문학모임도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문예반 없는 학교가 많다고 한다. 문예창작이나 독서반이 없을뿐더러, 백일장도 크게 줄었다. 대신 논술대회가 생기기는 하였으나, 백일장과 달리 입시교육의 연장에 가깝다.

백일장(白日場)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말이다. 사전에서는 이 말을 글짓기 장려하기 위해 실시하는 대회라 풀고, 조선시대에 학업 장려를 위해 실시한 글짓기 시험이라 부연하였다. 백일(白日) 곧 ‘대낮’이라 표현한 이유에 대해 누리꾼 의견 분분하다. 실력을 백일 하에 드러낸다는 의미라고도, 뜻 맞는 사람들끼리 달밤에 시재 겨룬 망월장(望月場)에 견준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어처구니’가 맷돌 손잡이라거나 궁궐 지붕 잡상이라는 설명처럼, 백일장과 망월장 유래도 그 근거가 약하다.

백일장 유래는 씁쓸하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4년(1414)조에 처음 등장하는데, 과거시험 답안지 제출을 유시 초(오후 5시 반 이전)로 한정하면서 비롯하였다고 적었다. 시험이 낮에 끝나서 백일장인데, 3년 후 기록에 그 이유가 나온다. 변계량이 시험장에 촛불 밝힌 야간시험 금지를 청하자, 태종이 잘 짓는 글은 대체로 더딘데 그렇게 하면 좋은 인재를 잃지 않겠나 묻는다. 그러자 밤에 폐단이 많고, 지난해 친람하셨을 때도 범법이 있었다고 아뢴다. 백일장 제도는 컴컴한 밤 난무한 부정행위가 원인이었다.

지금도 백일장 진행은 600년 전과 다르지 않다. 특별 인쇄한 원고지를 주고, 한곳에 모여 짧은 시간에 끝낸다. 시제는 즉석 발표이며 참고서적 지참은 물론 금지다. 그러나 정작 달라진 건 응시생이다. 과거 사서삼경 등 수험서를 퉁채로 암기하다시피한 데 반해 지금은 암기력이 확 떨어졌다. 필자도 불과 10여 년 전 수백 개 전화번호 외우고 악보 없이 수십 곡을 불렀지만, 지금은 아내 전화번호가 헷갈리는 지경이다. 현대인의 이러한 기억력 감퇴는 물론 문명의 이기가 그 필요성을 없앤 탓이다. 전화번호는 휴대폰에 들었고, 노래가사는 반주기에 쌓였다.

암기력보다 창의력이 긴요한 4차산업혁명 시대이니만큼 기억은 앞으로도 시나브로 떨어질 터이다. 그러나 백일장에서만큼은 암기력이 여전히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그러니 백일장에서 뛰어난 문재 발굴하려면 시대 변화에 따른 배려가 따라야겠다. 글에는 정확한 남의 주장도 필요하고, 신뢰도는 수치 인용으로 상승한다. 자료 검색과 인용은 표절도 아니다. 글이 감성 표출과 두루뭉수리에 그치지 않으려면 자료 찾고 확인도 거침이 옳다. 컴퓨터로는 유려한 편집과 교열이 가능하다. 노트북이나 휴대폰 사용과 작품의 전자파일 제출 허용하면 어떨까, 종이 원고지는 작가들도 쓰지 않는다.

백일장 장원을 행운처럼 생각하는 이 많은 것은 평가에 대한 회의이다. 심사 참여한 지인에게 들으니 수백 편 중에 장원 가려내기 어렵겠다. 작품은 고만고만하고 독특한 서체들은 가독성을 떨군다. 그렇다고 글씨체나 철자법까지 평가에 작용하면 되겠는가. 요즘 학생들은 입시에 매여 글쓰기 경험이 많이 줄어들었다. 돌아보면 필자는 학창시절 글쓰기로 상처와 불만을 덜어낸 것 같다. 글쓰기에서 제약을 풀어 학생들이 자유롭게 자기를 드러낼 수 있다면 좋겠다. 수백년 역사의 전통에 전자적 편리를 더하면, 백일장이 다시 흥하지 않을까.

유호명 경동대학교 홍보센터장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